푸른 하늘의 카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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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Kai에서 2019년 2월 21일 발매한 미소녀 게임 『푸른 하늘의 카뮈』 (青い空のカミュ, 아오카뮤)의 분석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 부분 은 기본적으로 접혀있으니 펼쳐서 읽기 전 주의 바랍니다.
리뷰에 사용된 CG의 모든 권리는 게임 제작사인 Kai에 있습니다

『푸른 하늘의 카뮈』리뷰

제목: 푸른 하늘의 카뮈(青い空のカミュ, 아오카뮤, あおかみゅ, BSC)
제작사: 카이(Kai)
작가: 시메사바 코하다(〆鯖コハダ, Shimesaba Kohada)
속성: 미소녀 게임, 미연시, 스토리게, 에로게, 철학


목차

01. 게임 소개
02. 요약
03. 도입부
04. 소재
05. 작품 구성
06. 캐릭터 디자인과 보이스
07. 텍스트
08. 원화
09. 서비스신/H신
10. 음악
11. 시스템
12.『푸른 하늘의 카뮈』가 갖는 특이성
13. 시나리오
14. 특장점
15. 아쉬운 점
16. 게임이 말하고 싶었던 것
17. 총평

표시가 붙어있는 부분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펼쳐서 읽기 전 유의 바랍니다.



게임 소개

푸른 하늘의 카뮈

원제: 青い空のカミュ
영제: 영제: Camus in The Blue Sky
별칭: 아오카뮤(あおかみゅ, BCS)
2019년 3월 29일 Kai에서 발매한 미소녀 게임.

요약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짧지만 굵은 철학적 스토리게
『푸른 하늘의 카뮈』는 철학적 테마를 녹여내고자 하는 고심이 느껴진 작품이다.

문학 및 철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플레이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드러나는 메타포와 암시는 난이도가 높은 편이며 시나리오의 해석 역시 그 모티브를 이해하지 않으면 쉽사리 납득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파고들수록 복잡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도입부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시시포스가 행복하지 않다고,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친구인 린과 호타루는, 마을에서 쇼핑을 하다 평소보다 한참 늦은 시각에 전철을 타게 된다. 노곤함에 졸던 린이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이미 호타루가 사는 마을인 종점에 도착해 있었다.

린은 호타루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결심했는데, 머지않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퇴근길로 사람이 오갈 시간대임에도, 그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두 소녀를 맺어주는 3일간의 이야기다. 그저 완벽한 날의 뒤틀린 부조리다. 하늘은 푸르고 끝없이 투명하게 무의미했다.

Qui a tué fille
그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캐치프레이즈의 원문은 "―シシュフォスが幸せでない、と僕たちはどうして言えるんだろう?―"이다.
시시포스 이미지 보기/접기
Antonio Zanchi의 회화『Sisyphus』(1660-1665). 도입부에서 언급한 시시포스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이 거한이 정말 이 게임과 상관있냐고? 정말이다.

소재

『푸른 하늘의 카뮈』가 다루는 소재는 미소녀 게임으로서는 굉장히 독특한 편에 속하며 게임이라는 큰 카테고리 내에서도 확실히 드문 것들이다.

철학

철학 중에서도 《알베르 카뮈》의 사상을 기반으로 깊이 있는 화두를 던진다.「맞닥뜨린 부조리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라는 심오한 주제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20세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 저널리스트.
부조리 철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데 정작 본인은 창시자도 아니었으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것을 싫어했다.
알베르 카뮈 이미지 보기/접기
1957년의 알베르 카뮈. 이 사람도 정말 이 게임과 관련있느냐고? 이것도 정말이다.

우정과 사랑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통해 진정한 우정은 무엇이며, 진실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인스턴트 사랑이 정석에 가까운 업계 트렌드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하다.

공포

미지에 대한 공포를 초반부터 줄기차게 묘사한다. 호러 게임처럼 플레이어를 놀라게 하거나 플레이 자체에 지장을 줄 만큼 무서운 유형의 것은 아니다. 보는 동안 찝찝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싹한, 그런 종류의 공포에 가깝다.

행운과 행복

행운과 행복에 대한 고찰이 나오며 둘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조망한다.

작품 구성

플레이타임

총 플레이타임은 약 6~8 시간이다. 이해를 위해 앞의 내용을 복기하는 경우, 훨신 더 길어질 수 있다.

진행과 엔딩

『푸른 하늘의 카뮈』는 전부 올바른 선택지를 고르게 되면 경우의 수가 없는 일직선 구조의 작품이다. 여기에 직행 가능한 배드엔딩이 분기별로 마련되어 있으며 총 6개.

진행 도중 화면에 글리치(Glitch)가 생길 때 진입하면 사이드 혹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제공되는데 인물들의 심상은 물론이고 작품의 이해를 돕는 단서들이 제공되므로 전부 보는 것이 좋다. 작품에 등장하는 글리치는 총 16개다.
글리치 이미지 보기/접기
글리치가 발생하게 되면 우측에「」처럼 진입 버튼이 생긴다.

추천 순서

앞서 설명한 대로 일직선 진행에서 분기로 갈라지는 구조이고, 순서 자체가 일종의 스포일러 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깔끔한 플레이를 원한다면 공략을 보는 것이 좋다. 16개의 글리치는 반드시 볼 필요는 없으나 작품의 이해에 소소하게 도움이 된다.

캐릭터 디자인과 보이스

미마사카 호타루 (三間坂 蛍) 소심한 주인공

CV: 사카키바라 유이
미마사카 가문의 딸. 난데없이 마주한 이변에도, 린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트윈테일에 금잔화 모양의 헤어핀을 달고 있다. 린과 달리 토시는 걸치지 않았고, 속에 흰 프릴이 달린 치마와 팬티 스타킹을 착용했다. 묘하게 생긴 동물 크로스백을 메고 있다.
속성: 친절함, 솔직함, 소극적

코미타니 린 (込谷 燐) 기운찬 주인공

CV: 아오이 하루
주도적이고 행동력이 강한 소녀. 호타루의 친구이며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리본 머리띠를 달고 있다. 팔에는 흑색의 토시를 걸쳤고 프릴이 없는 홑치마에 사이하이 삭스를 입고 있다. 튼튼해 보이는 백팩을 메고 있다.
속성: 활동적, 주도적, 상냥함

오오모토 님 (オオモトサマ) 신비한 조언자

CV: 나루세 미아
일행이 만나게 되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존재
머리장식은 술 달린 비단 머리끈(房付き正絹飾り紐)으로 보인다. 기모노를 입고 오비(帯)를 앞으로 매고 있는데, 전신샷을 보면 걸치고 있는 우와기(上着, 겉옷)이 매우 긴 것이 눈에 띈다.
속성: 친절, 신비, 조언자

사토 군 (サトくん) 하얀 개

호타루와 린을 따라온 하얀 개. 사토 군이라는 이름은 린이 붙여준 것이다.

타카모리 사토시 (高森 聡) 린의 사촌

린의 사촌. 일행들에게는 최근의 소식이 알려진 바 없다.

텍스트

적당한 호흡에 무난하게 읽기 편한 문장을 구사한다. 상황과 순간의 심리 묘사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전지적 시점으로 호타루와 린의 행보를 따라가는 만큼 작품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문학 작품과 철학을 인용하는 메타포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불친절한 표현도 때때로 등장하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원화

인물 조형의 경우 눈 사이의 간격이 넓은 스타일의 그림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호불호가 갈린다.

배경은 실사풍 기반에 몽환적 분위기를 가미하여 필요에 따라 배합을 조절하고 있으며, 퀄리티가 훌륭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준다.

작중에서 보여주는 배경 CG 중 하나


서비스신 / H신

독특한 그림체 때문에 사실 기능적인 의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H신의 경우 배드엔딩에서만 등장한다.

사운드

배경 음악

『푸른 하늘의 카뮈』는 배경만큼이나 BGM이 멋진 작품이다. 양질의 곡이 적재적소에 쓰였으며 각각의 곡들은 장면 분위기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원자에 그린 그림」과 같은 곡은 코러스를 넣은 두 개의 버전을 추가로 사용하여, 때에 따라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소립자의 등대」에서는 호른을 주축으로 한 브라스가 돋보이는 두 개의 버전을 추가로 사용하여 아련함을 더했다.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곡을 뽑자면 「패각 시계」. '푸른 하늘의 세계'의 신비함을 완벽하게 표현해준 멋진 곡이었다.

『푸른 하늘의 카뮈』에서는 버릴 곡이 없다

OP, ED

보컬 곡들 역시 그 자체로 뛰어날 뿐 아니라 본편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가사까지 지니고 있어서 듣는 즐거움이 있다. 특히 게임 타이틀과 동명인 「푸른 하늘의 카뮈」는 게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개인적으로 매우 좋았다.

SE

빗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발소리 등등 양질의 SE이 다량 사용되어 현장감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시스템

편의성

점프를 비롯한 각종 편의기능들이 전혀 없다. 여기저기에 떡밥이 산재한 게임 특성상 체감되는 불편함은 크다. 그나마 분량이 짧은 게 다행일 지경.

참조: 『푸른 하늘의 카뮈』가 갖는 특이성

『푸른 하늘의 카뮈』는 여러가지로 일반적인 미소녀 게임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푸른 하늘의 카뮈』의 특수성과 참조사항 보기/접기

일반적인 미소녀 게임의 본질

오래전부터 미소녀 게임은 초기의 '자유도를 한껏 활용하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대신, 소수의 선택지만 갖춘 채로 시나리오적인 '보여주기' 및 소설적인 '내면묘사'에 집중하는 측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연애 요소가 듬뿍 들어간 텍스트 어드벤쳐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작품들이 여전히 연애를 메인으로 택하거나 적어도 끝에 가서는 연애로 마무리하는 것을 고수해 왔다. 즉 미소녀 게임은 연애가 본질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게임인 것이다.

본작이 보이는 차이점

그러나 이 게임은 '보여주기'의 특성을 강화한 것 말고는 주류 작품과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 1인칭을 택하는 절대다수의 게임들과 달리 3인칭 전지적 시점을 고수하고 있으며, 삶의 의미와 죽음, 세계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끝까지 관철한다.

배드엔딩에만 포함된 H신은 오히려 부조리의 상징과도 같이 부정적으로 그려지며, 일방통행의 정석 루트에서는 그를 대신하여 성적 은유에 그치는 점 역시 흥미로운 차이다.

싸우는 미소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하드한 능욕계 게임을 만들던 제작사 KAI가 어째서 노선을 여기까지 틀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혹시 미소녀 게임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라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일까?

다르기에 느껴지는 이질감, 그럼에도 평가할 수 있는 가치

『푸른 하늘의 카뮈』는 메타포(은유)를 적극 활용하고 있고, 여러 문학 작품과 철학 사상을 모티브로 삼거나 차용하고 있다. 이를 모두 인지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면, 보다 깊이있는 플레이 및 분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미소녀 게임을 하면서 '부조리극' 및 '삶과 죽음의 의미'와 같은 무거운 테마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에로게 주제에 무슨 심도있는 주제를 논하고 거드름을 피우냐는 냉소적 시선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침체되어가는 이 장르에서 철학을 주제로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다양성의 증가, 즉 시장이 필요로 하는 '유전자 풀의 증대'와 마찬가치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취향과 별개로 "에이, 똥겜이네."라는 한 마디로 치부하기보다는 의도를 헤아리려는 편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라이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풀어서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기에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제작사가 의도한 수준의 '고찰'까지 간 유저는, 아쉽지만 상당히 적은 숫자가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굳이 이렇게 긴 서론을 쓴 이유

이 게임은 미소녀 게임의 주류와는 굉장히 동떨어져 있고 미스테리적 속성이 강하다. 게임을 하지 않고 스포일러를 보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지만, 답안지를 본 뒤 게임을 하게 되면 추리적 요소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와 절정 부분에서 느껴질 감동이 현격하게 떨어질 것이다.

또한 본작을 플레이하지 않았거나, 대략적 줄거리도 모르는 채로 리뷰의 시나리오 파트를 읽는 것은 리뷰의 이해에도 어려움을 더하는 것이다. 그 점들을 충분히 감안하고 스포일러 파트의 내용을 읽을지 말지 결정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수 시간의 플레이타임이 아깝지 않았던 양작으로 느꼈으며, 내가 느꼈던 것들을 다른 이들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주의: 스포일러


하단의 항목에는 『게임명』의 핵심 스포일러 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주의 바랍니다.







시나리오

분기라고는 다 배드엔딩 직행 뿐이고, 선택지만 올바르게 고르면 샛길이 없는 일직선 진행이기 때문에 먼저 전체적 스토리를 간단히 요약하도록 하겠다.

시나리오: 줄거리 요약

각 일별로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기본적으로 암시나 복선이 비교적 충실하고, 늘어지거나 뇌절하는 것 없이 끝까지 이야기의 속도를 잘 유지하였다. 다만 묘사가 불충분하여 해석에 어려움을 주고 회수되지 않는 복선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며, 소설적 자유를 다소 무시하는 지점도 있다. 테마 자체는 무겁지만, 그 테마를 온전히 다루기에는 분량이 부족하다는 점도 아쉬운 점이다.
줄거리 요약 보기/접기
첫째 날 (First Day)

호타루와 린이 뒤틀린 세계에 휘말린 후, 호타루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얼굴을 잃은 채 피부 틈새로 검은 무언가만이 비춰보이는 흉물스런 이형의 존재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게 되고, 그들에게 쫒기던 호타루와 린은 원숭이 형상의 괴물 '히히'와 맞딱뜨리게 되는데, 하얀 개 '사토 군'이 나타나 미끼가 되어 준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호타루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둘은 '푸른 세계'와 조우하게 되며 신비한 존재인 '오오모토 님'과 마주하게 된다.
둘째 날 (Second day)

호타루와 린이 뒤틀린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전반부다.

린은 호타루를 태운 차를 몰고 외부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지만 그 끝이 막혀 있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다시 뛰어든 푸른 세계에서 호타루는 자신이 자시키와라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실로 돌아와 되돌아가던 중 연료가 고갈된 차는 퍼지게 되고, 둘은 거세지는 비를 피해 근방 건물에 숨지만 히히와 다시 만나게 되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재차 사토 군의 도움을 받는다.

히히가 떨어뜨린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간 린은 사토시의 노트를 줍게 되며 그를 통해서 사토 군과 히히는, 린이 사랑하던 사촌오빠 사토루가 내적 갈등 끝에 쪼개진 존재들임이 밝혀지게 된다.

피로도가 쌓이고 충격까지 받아 지쳐가는 린에게 호타루는 기운을 북돋아주며 종이 비행기를 접어서 함께 날린다.
셋째 날 (Third Day)

호타루와 린이 뒤틀린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후반부.

호타루와 린은 둘 다 중대한 무언가를 깨닫고 결심한 모습을 보인다. 호타루는 이형의 존재들에게 도움을 받아 전차대를 원상복귀시키는 데 성공한다. 사토 군과 히히는 동귀어진한 뒤 이형의 존재들과 함께 승천하고, 뒤틀린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오오모토는 그녀가 머물던 집의 문, 창문들과 함께 종척을 감추게 되고 푸른 세계의 역에는 드디어 전철이 도착한다. 호타루는 전철에 바로 올라타지만 린은 찰나의 망설임을 보이고 결국 전철이 떠나가면서 둘은 헤어지게 된다.

정신을 차린 호타루는 곁의 린을 보고 안도하나, 머지않아 그녀는 사라진다. 풍차의 세계에서 함께 날렸던 종이 비행기가 어느 새 날아와, 눈물을 흘리는 호타루의 앞에 보란 듯이 떨어진다.

호타루는 종이 비행기를 줍기 위해 손을 뻗고 그 시점에서 게임이 끝난다.

3일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시나리오: 《알베르 카뮈》와「부조리관」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본작의 핵심 요소인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관」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본작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면서, 난해함으로 인해 평가를 깎아먹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미 철학 사상을 메인으로 하는 것부터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그 안에서도 일견 모순을 담은 듯한 카뮈의 「부조리관」을 고른 이상 게임의 납득을 위한 장벽은 드높다고 할 수 있다.

부조리관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대부분의 유저는 본작에 대해「분량도 짧고 내용은 애매하며 결말은 찝찝한 그저 그런 게임」 혹은 「이상한 게임」정도의 낙인만 찍고 끝낼 확률이 높다.

물론 이런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는 것이 실력이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역량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보고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면죄부나 주는 불쏘시개'라는 평가는 하지 않듯이, 사색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내용은 접어놓은 하단부 참조.
부조리관과 작중의 차용에 대한 해석 보기/접기

《알베르 카뮈》에 대해

작품 제목인『푸른 하늘의 카뮈』에 등장하는 카뮈(Camus, ミュ)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며 사상가인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캐치프레이즈인〔Qui a tué fille〕역시 프랑스어이며 이것 또한 프랑스인인 카뮈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게임 타이틀에 등장하는 아래의 문장은, 카뮈의 명저로 손꼽히는 『이방인』 (The Strangers)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의 영문 버전이다.
I opened myself to the gentle indifference of the world.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 『이방인』의 사형수 뫼르소, 마주한 죽음을 받아들이며 행복을 느끼는 장면
작중에서는 이 대사를 확실히 연상할 수 있는 장면이 2회 등장한다.
작품 중
린이 자신을 받아들여 줄거란 확신에, 밝아지는 호타루의 기분이 묘사되는 장면
최후에 린이 사라진 뒤 호타루가 눈물을 흘리며 종이비행기를 맞이하는 장면
이 작품에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인 『이방인』,『페스트』,『시시포스 신화』등이 모티브가 되거나 인용되는 장면들이 다수 등장하며 게임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주제 역시 그의 「부조리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방인 L'Étranger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1942년 발표한 소설. 영제인 The Stranger 역시 인지도가 높다.
부조리에 대한 수준높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난해한 작품임에도 프랑스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스터디셀러 중 하나.

카뮈의「부조리관」

카뮈라는 인물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앞서 수 차례 언급한 「부조리」라 할 수 있다. 비록 생전의 본인은 부조리가 자신을 대표하는 것이 되길 원치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부조리관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인간은 반복되는 습관으로 끝나는 삶, 부조리한 현실에 놓여 있다. 그러다 명철한 사고 끝에 부조리를 깨닫는데, 그 순간 자신이 우주에 공허하게 내던진 비극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부조리의 자각 - 알베르 카뮈
등장인물들이 부조리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 각성하는 장면들은 카뮈의 사상에서 부조리를 깨닫는 절차와 유사하게 묘사된다.

부조리를 느끼는 단계 - 호타루와 린

작품 내에서 호타루와 린이 겪는 일들도 부조리관의 인식 단계를 그대로 밟고 있다.
먼저 기존의 세계관이 붕괴되며 세계를 낯설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을 보며 '저들은 왜 살아갈까'라는 막연한 불안과 함께 그들 역시 낯설게 느끼기 시작한다. 최후에는 자신 역시 그들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마저 '이방인'이라는 낯선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부조리를 느끼는 단계 - 알베르 카뮈
호타루와 린은 뒤틀린 세계를 낯설게 느끼며, 그곳을 거니는 좀비들 역시 낯설게 느낀다. 그러나 호타루는 자신이 자시키와라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린 역시 슬픔을 짊어지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그런 삶을 견딜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들 역시 낯설게 느끼게 된 것이다.

다만 속성과 묘사, 엔딩에서의 위치 등등을 고려해보면「이방인」에 가장 가까운 것은 호타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타루와 린이「푸른 세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린은 자신의 뺨을 후려치며 현실 여부를 확인한다.

「부조리」에 반응하는 세 가지 모습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를 맞이했을 때 보이는 세 가지 모습을 각각「도피」,「순응」,「저항」으로 묘사한다. 특히 저항에 대해서는 「반항심과 자유를 지니고, 열정적으로 살아간다(양의 철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럼 누군가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반항심과 열정은 알겠는데, 자유는 왜 들어가지?
그에 대해 추가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조리를 자각한다 내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존의 습관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진다 자유로워진다
그는 부조리로 얻은 자유, 부조리에 대한 반항심을 지니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자며, 질(質)적 경험 대신 양(量)적 경험을 쌓자는 '양의 철학'을 내세운다. 본작에서도 글리치라는 수단을 통해 여러 사람의 삶을 비춰주고, 그것에 대한 시시비비를 떠나서 최대한 많은 것을 접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식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양적 철학」의 경험을 시켜준다.

카뮈는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은 비극적 결말을 불러온다 말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각오하고 열정으로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작품의 엔딩 역시 「저항」과 연결되는데, 『은하철도의 밤』을 다루면서 재차 논하겠지만 호타루는 부조리한 세계(린을 잃음)로 인해 고통을 겪었으며, 날아온 종이비행기는 그녀에게 상실의 아픔을 각인시키는 동시에 앞으로의 고통마저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타루는 앞으로도 있을 어려움을 각오하고 인간적으로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본작은 메세지로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을 택한, 나약한 보통의 인간들이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정복자」

카뮈는 저항하는 유형을 「돈 후안」, 「배우」, 「정복자」라는 세 가지로 분류했으며 여기서는 본작과 연관이 깊은 정복자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정복자」란 패배가 예정된 투쟁임에도 끝까지 싸우는 존재로, 카뮈의 저서 『시시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시시포스 신화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부도덕을 짚은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는 그 형벌로 죽음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자신을 찾아온 죽음의 신을 제압하고 가둬버리고 세상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결국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끌려오나 탈출에 성공하여 천수를 누렸고 그에 대한 대가로 사후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정상에 오른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가기에 이는 영원한 신벌이었다.
그리고 카뮈는 시시포스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시시포스는 돌이 떨어질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산 위로 돌을 굴린다.
그는 부조리를 알고 있으나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 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으로서 그 일을 한다.
게임 내 호타루와 린도 부조리를 깨달으며, 그것이 필연이 아닌 우연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계속해서 분투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행복과 행운」 단락에서 설명한다)

한편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인간에게 사랑을 권하며, 타인과 연대해 나가는 것으로 저항의 끊을 놓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학교 수영장 장면에서 다룰 것이기에 짤막하게만 언급하겠다)
『페스트』
《뤼》와 《타유》는 페스트라는 거대한 부조리에 저항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우정을 키워 나가고, 「죽음에 거부감이 든다」는 자신들의 공감을 통해 연대한다.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의 카뮈』에서 호타루와 린은 뒤틀린 세계라는 부조리에 저항하며 우정을 키워 나가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공감하고 연대해 나간다.


시나리오: 게임 내 인상적인 주요 장면들과 그 해석

본작에는 메타포(은유)가 함유된 장면이 매우 많다. 오히려 대부분의 장면이 메타포를 품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핵심 장면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흔들다리 위에서 호타루와 린을 쫓아오는 하얀 손들, 요모츠헤구이, 입만 남은 괴물들, 배드엔딩의 H신, 이형의 존재들, 밤의 교제, 사토시의 독백에 대해 분석해본다.

자세한 내용은 접어놓은 하단부 참조.
주요 장면의 해석 보기/접기

흔들다리 위에서 호타루와 린을 쫓아오는 하얀 손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설화나 신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생자(生子)와 망자(亡子) 간의 규칙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다. 그 금기를 어겨서 피를 보고야 마는 이야기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으로 간 오르페우스는 명계를 자신의 음악 솜씨로 감동시켜, 죽은 아내를 데리고 갈 권리를 얻어낸다. 하지만 지상에 도착하기 전 금기를 어기고 불안감에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오던 에우리디케를 결국 저승에 두게 되고 말았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서양에서 가장 유명하고 알려진 '금기'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과 거의 똑같은 전개의 신화가 동양에도 존재한다. 바로 일본의『고사기』에 포함된「이자나기 신화」이다.
이자나기 신화
저승으로 간 이자나기는, 죽은 아내가 이미 저승의 음식을 먹어 돌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내 이나자미는 저승의 신들과 의논해볼 테니 그에게 얌전히 기다리라고 전했지만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불빛을 통해 그녀를 보았고, 구더기로 들끓는 그녀의 모습에 질겁을 하고 도망치게 되었다. 결국 그와 그녀는 영원한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
게임에서도 역시 유사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흔들다리 씬이다. 여기서 호타루는 공포로 인해 잠깐 뒤를 돌아보고야 마는데, 수많은 손들이 그녀에게 오라는 듯 손짓을 하는 동시에, 생장하여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린은 자신에게 뒤돌아보면 안된다고 되뇌이며, 호타루 역시 린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 뒤에는 다신 뒤를 살피지 않았다는 묘사와 함께 도망에 성공한다.

망자들은 그 본질을 직시해서는 안 된다.

린의 「요모츠헤구이」

요모츠헤구이란 일본의 설화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황천의 음식을 먹게 되면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요모츠헤구이 黄泉戸喫, ヨモツヘグイ
저승의 불로 만든 음식을 먹음으로써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됨을 가리키는 일본 신화의 개념.
일본에서 음식물이 든 토기를 망자와 함께 묻는 옛 관습은 이처럼 식사라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설화,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봤는데?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 올림푸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르세포나게 석류를 먹었다가 저승에 머무르게 된 일화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푸른 하늘의 카뮈』에서 호타루와 린은「푸른 하늘의 집」을 방문하는 시점부터 여러 차례 음식을 섭취할 기회를 제공받게 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타루는 단 한 번도 먹거나 마신 바가 없었지만 린은 매회 맛을 보게 된다.
작중 등장하는 요모츠헤구이

푸른 세계의 물 (1단계)
린은 물을 마신 뒤 무색무취라고 평을 남긴다. 호타루는 손대지 않는다.

푸른 세계의 복숭아 (2단계)
오오모토가 직접 깎아주며 둘에게 권하나, 린만 받아 먹는다. 역시 감상은 무색무취. 어떻냐는 오오모토의 물음에도 린은 맛을 잘 모르겠다 정도로만 평을 남기고, 그에 대해 오오모토는 미묘하게 아쉬워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오오모토: "그래...... 그렇다면, 아직 모르네요."
- 오오모토, 복숭아 맛이 미묘하다는 린에게

푸른 세계의 케이크 (3단계)
생복숭아 대신 황도를 얹은 케이크가 등장했고, 린은 맛을 본 뒤 맛있다고 평가한다. 호타루는 생크림을 못 먹는다며 물러난다. 이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 뒤 식사를 할 때도 린은 그 케이크의 맛만 못하다고 말하게 된다.

푸른 세계의 차 (4단계)
오오모토가 둘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면서 권한다. 린은 마신 뒤 맛있다고 말한다. 호타루는 잔을 들다 꺼림칙함을 느낀 듯 다시 내려놓는다.
위의 1~4 단계 외에 오오모토의 다음 대사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오오모토: "당신들은 아직, 여기서 살 수 없어요. 지금은 거짓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발을 디디고 있을 뿐."
- 오오모토, 린과 호타루에게
오오모토의 '아직'이라는 말은 어떤 조건을 충족한다면「푸른 세계」의 주민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일시적'이라는 발언 역시 뒤집어 보면 '영구적'으로도 거주가 가능한 방법이 있다는 뜻이 된다.

푸른 세계의 음식에 대한 린의 변화
무색무취 (1, 2단계) 맛있다 (3단계) 현실보다 더 맛있다 (4단계)
석류 대신〔물, 복숭아, 케이크, 차〕라는 4단계로 세분화되긴 했으나 린이 요모츠헤구이가 연상되는 변화를 보인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그녀가 푸른 세계이자 완벽의 세계, 틈새의 세계인 '그 곳'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복선이차 연출인 것으로 보인다.

오오모토의 행동은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것일까. 어쩌면 동료를 늘리고 싶다는 속셈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입만 남은 괴물들과 배드엔딩의 H신에 대하여

배드엔딩에서 호타루와 린을 범하는 이 괴물들은, 눈이 없는 대신 입만 돌출된기괴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는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내려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상대를 살피고 감정을 나누는 기관인 ''을 상실했다는 것은,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거나 교감을 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욕구 충족, 즉 일방통행의 통보와 성적 만족의 추구에만 충실한 존재들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작품 내에서도 오오모토에 의해 그들은 욕망만이 남은 존재임을 언급해주나, 그들은 단순히 욕망에 찌든 것이 아니라 상대를「무시」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점이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에 대해서는 프랑스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다음 텍스트를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앞서 말한 카뮈도 그렇고 조금 뒤에 이야기할 사르트르도 그렇고 프랑스 철학자들에게서 모티브를 여러모로 챙겨 온 듯하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중략) 타인은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나 자신을 세우도록 유도한다.
『타인의 얼굴』중 - 에마뉘엘 레비나스
인간은 타인의 얼굴을 봄으로써 자신의 이기주의를 억누르고, 스스로의 행위에 도덕적 제한을 건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눈이 없는 존재들은 타인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윤리 따위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저들은 게임 내적으로는 가해자가 된 부조리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해석을 게임 외적으로 넓혀보자면 현실의 존재들에 대한 빗댐, 에로게의 주인공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성립할지도 모른다.

또한 배드엔딩에서 능욕당하는 호타루와 린의 묘사는 분기와 무관하게 한결같은데, 둘은 계속 붙어있으며 끝까지 저속해지는 일 없이 닥치는 괴로움을 견뎌낸다. 이는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시시포스 신화』중 -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의 저 장면은 무의미한 일을 꿋꿋하게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를 의미하기에 호타루와 린 역시 참고 견딘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일방적 욕망 그 자체다.

무언가(なにか), 이형의 존재들에 대한 묘사

마을 주민들이 변한 결과물인 「무언가」들에겐 「입만 남은 기괴한 얼굴」이라는 외적 특징이 있는데 이 점은 앞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들에게는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내적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특정 행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농부 좀비: 수확
교사 좀비: 과제
경관 좀비: 처벌
오오카와 좀비: 자르기(장식)
작업자 좀비: 수리
이들은 그 행위에 소름끼치는 집착을 보이며, 행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개의치 않는다. 가령 오오카와 좀비는 요시무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가락을 죄다 잘라서 분재에 장식으로 꽂아놓았으며, 경관 좀비는 아무에게나 총을 갈겨대며 쓰려트렸고, 작업자 좀비는 기계를 때려 수리하듯이 반장을 스패너로 휘갈긴 끝에 그를 해치운다.

앞에서 이야기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얼굴을 봄으로써 이기심을 억누르고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도 이와 연관이 있지만, 저들의 행위 자체는 카뮈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이해가 쉽다.
인간의 삶을 다스리는 것은 삶의 관성인 「습관」이며, 이 때문에 인간은 익숙해지고 삶에 대해 고뇌하지 않게 된다
습관 - 알베르 카뮈
저기서 「습관」이란 「나는 이것을 왜 하는가?」라는 고찰 없이 매일 반복하는 일들을 가리킨다. 카뮈는 이 습관 속에서 「왜?」라는 의문을 던져야만 부조리의 각성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푸른 하늘의 카뮈』에서 등장하는 좀비들은 자신의 행위에 의문을 갖지 않으며, 상황이 어떻게 되든 그 행위들을 하는 데에만 골몰한다. 카뮈가 말하는 바와 같이「왜 하는가」의 성찰 없이 그저 반복만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작중에서 그들이 부조리의 각성을 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호타루의 각성에 영향을 받아 그녀를 도운 뒤, 입자로 흩어지며 승천하는 장면만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작중에서는「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표현으로 보충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파트가 없다는 것은 역시 아쉬운 점이다. 호타루의 말 한마디로 갑작스레 변화하기에는 개연성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 의도라는 것은 잘 전달되도록 표현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 곡해되더라도 불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쨌든 좀비들조차 육신을 벗어던지면, 즉 본질적으로는 선한 존재라고 묘사되고 있으며, 그들은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 본연의 모습도 상징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적」으로 규정하긴 껄끄럽다.

좀비들은 무의미한 상황에서도 생전에 주로 하던 행위에만 몰두할 뿐이다.

호타루와 린이 학교 수영장에서 나누는 밤의 교제

『푸른 하늘의 카뮈』에는 카뮈의 『페스트』를 오마주한 장면이 있다.
당분간 두 명은 풀을 감돌고 있었다. 물과 공기의 경계에, 소녀들이 있다. 어느 쪽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감각 속에서, 다만 근처에 서로가 있음을 안다. 두 명은 동시에 모두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충족감을 느꼈다.
- 호타루와 린이 학교 풀에서 쉬는 장면 중
소설『페스트』에서 의사 뤼와 지식인 타르는 이타적 삶을 살며, 페스트 환자들을 위해 앞장서는 선인들이다. 그들은 서로가 죽음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고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감을 나누며 그 우정의 징표로서 달밤에 해수욕을 하기로 한다.
해수욕을 합시다. 미래의 성자일지라도, 이것은 부끄럽지 않은 즐거움입니다.
『페스트』에서 뤼와 타르가 달밤의 해수욕을 나누는 장면 - 알베르 카뮈
양쪽 다 동성의 두 인물이, 밤하늘 아래 오로지 둘만으로, 이상현상 또는 페스트를 비롯한 부조리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행복 그 자체를 만끽하는 인상적 장면이다. 이것은 일종의「성적 은유」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사장면과는 다르게 고상하면서도 약간은 근질거리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흥미롭게도『푸른 하늘의 카뮈』에서 호타루와 린의 H신들은 오직 배드엔딩에서만 발생한다. 본편의 정사(正史)를 따라갈 경우에는 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둘의 신체적 교감은 기껏해야 수영장에서의 교제, 호타루가 린의 이마에 키스하는 정도가 전부다.

이는 서로를 소중히 하고 싶다는 둘의 의지가 관철된 것으로 보이며, 「소중한 것을 깨끗한 채로 두고 싶다」는 주요 갈등 소재에 대한 답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토시의 독백

사토시는 프랑스 철학가 《장 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문구를 그의 이름과 함께 두 차례 언급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히 죽는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 - 장 폴 사르트르
이 문구는 한번은 글리치 회상에서, 나머지 하나는 오오모토와의 대담에서 등장한다. 후자의 경우 사토시는 저 문구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사르트르)의 대척점에 서 있던 누군가(카뮈)를 믿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카뮈는 원래 사르트르와 돈독한 관계였으나, 공산주의 이념을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갈라졌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인간에게 짐승이다」라는 토마스 홉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복종의 계약과 전체성을 강조하였지만, 카뮈는 인간의 연대성을 중시하며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카뮈는〔인간은 부조리에 함께 저항하는「반항」을 통해 타인과 결속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우리」를 인식한다〕라고 하였다.

즉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사르트르: 존재에는 의미가 없으며 인간에게는 매개자, 제도적 강제가 불가피하다.
카뮈: 삶에 의미는 없으나 의미를 지닌 무언가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사토시는 어처구니없는 우연으로 인해 죽은 자신을「이유 없이 태어나 존재를 잇다가 우연히 죽는다」는 사르트르의 발언을 빌어 자조하면서도,「그럼에도 의미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카뮈를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이 당한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그에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토시는, 카뮈의 「정복자」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인물이다.


시나리오: 작품에서 언급되는 문학 작품들

본작에는 철학적 사상들 말고도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달팽이의 슬픔』, 『눈길 건너기』,『장갑을 사다』, 『고도를 기다리며』,『은하철도의 밤』등 문학 작품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이들 문학 작품은 줄거리의 복선으로 쓰이거나, 인물의 특징으로 반영되거나, 교훈을 차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에 반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접어놓은 하단부 참조. 『은하철도의 밤』은 엔딩과 관련하여 자세히 다룰 예정이기에, 여기 분석에선 제외하도록 하겠다.
작중에 등장한 문학작품들과 그 의미 보기/접기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グスコーブドリの伝記)

은하철도의 밤, 쏙독새의 별과 더불어 호타루가 언급하는 작품. 미야자와 켄지(宮沢賢治)의 동화다.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부도리는 기근(飢饉)으로 인해 부모를 소실하고, 여동생마저 유괴로 인해 잃고 만다. 성실히 일하며 매일을 견디던 그였으나 기근이 재차 찾아오자 도시를 찾아가 구보 박사 아래에서 공부를 하고 「화산국」에 근무하게 된다. 부도리는 지식의 힘으로 농사에 큰 기여를 하고 잃어버린 여동생까지 찾아오는 등 일이 잘 풀려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냉해(冷害)를 맞이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위적 화산 폭발을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에서 주인공 부도리는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일에 열성을 다했고, 아낌없이 공부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는 식으로 스스로의 방식을 철저히 관철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사토시에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늘 일에 열심이었다는 점, 자아가 분리된 뒤에도 「사토 군」의 형태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며 린을 지켜낸 뒤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이 그러하다.

『달팽이의 슬픔』(でんでんむしの悲しみ)

일본의 작가이자 시인인 《니이미 난키치》가 쓴 시. 작중에선 린이 언급한다.
『달팽이의 슬픔』

달팽이 하나가 자신의 등껍질에는 슬픔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다른 달팽이들에게 살아갈 수 없다고 토로하지만, 다른 달팽이들은 「너만 그렇지 않아, 내 등껍질에도 슬픔은 가득해」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결국 그 달팽이는 「슬픔은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몫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고 깨달은 뒤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푸른 하늘의 카뮈』에서는 달팽이 껍질의 이야기가 나온다. 달팽이는 그 껍질을 남기며, 그 기이한 「푸른 세계」는 마치 달팽이 껍칠처럼 「남겨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슬픔, 그렇기에 꿋꿋히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은 최후반부에서 린이 호타루에게 하는 발언인 〔나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데도 다들 살아가〕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린은 시에 등장하는 저 달팽이와는 달리,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빈 달팽이의 껍질마냥 「잔재」로 남기는 쪽을 택해버렸다.

『눈길 건너기』(雪渡り)

린이 언급하는 미야자와 켄지의 동화이다.
『눈길 건너기』

눈 쌓인 어느날, 시로와 간코 두 아이는 어린 여우 곤자부로를 만나게 된다. 인간과 여우는 서로 떡과 수수경단을 권하나 상대를 믿지 못하여 오해가 생기게 된다. 곤자부로는 해결을 위해 「환등회」에 둘을 초대한다.

약속의 날, 형들의 조언대로 카가미모치(鏡餅)를 챙긴 둘은 곤자부로와 여우 학생들의 환영을 받는다. 둘은 망설였으나 결국 여우 경단을 받아먹은 뒤 맛있음을 깨닫는다. 여우들은 신뢰를 얻었다며 감격하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한다.「여우들이 커서도 거짓말을 않고 사람을 시기하지 않으면, 여우들의 나쁜 평판은 사라질 거다」는 곤자부로의 말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와 「외형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이 동화의 교훈이다. 이는 글을 마무리할 때 따로 언급토록 하겠다.

『장갑을 사다』(手袋を買い)

니이미 난키치가 쓴 동화다.
『장갑을 사다』

겨울이 찾아오고 눈이 내렸다. 손이 차갑다는 아기 여우의 말에, 엄마 여우는 아이 손에 맞는 털장갑을 구해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오리를 훔치려다 인간에게 혼쭐이 난 기억이 떠올라, 그녀는 요술로 아이의 한쪽 손을 인간처럼 만든 뒤 장갑을 대신 사오도록 시킨다. 그녀는「꼭 사람의 손을 보여주렴. 사람은 상대가 여우인 걸 알면 큰일이 난단다」라고 신신당부한 뒤 아이를 보낸다.

아기 여우는 모자가게 주인을 찾아가지만 깜빡하고 반대편 손을 내민다. 그럼에도 가게 주인은 옆전 두 개를 받은 뒤 선선히 장갑을 건네준다. 밖으로 나온 아기 여우는 한 인간 모자의 다정한 이야기를 엿듣다 엄마가 그리워져서 후다닥 엄마 여우에게 돌아간다.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섭고 친절하다며 장갑을 낀채 손뼉치는 아기 여우의 모습에, 엄마 여우는「사람은 정말 착한 걸까?」라고 되뇌인다.
「다른 환경에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들의 삶」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내용이다. 이것 역시 마무리할 때 언급토록 하겠다.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고도를 기다리며』

'디디'와 '고고'는 국도 근처의 조그마한 나무 옆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어떤 인물인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모르면서 그를 기다린다. 그들에겐 고도라는 인물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다. 둘은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지만 의미가 없는 말의 연속일 뿐이다. 밤이 되어 심부름꾼 소년이 나타나 '고도 씨는 내일 옵니다'라고 전해준다.

다음날이 되었으나 고도는 오지 않았고, 둘의 대화는 여전히 맞물리지 않고 공허하다. 결국 '디디'는 소년에게 분노하며 그를 쫓아낸다. 잠에서 깬 '고고'는 고도가 왔냐고 물은 뒤,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디디는 고도를 만나야 함을 재차 강조한다.

둘은 나무를 바라보며 차라리 목을 매달까 생각하지만 끈도 없다는 사실에, 내일 끈을 챙겨와서 고도가 안 오면 스스로 교수하자 다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둘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기괴한 내용의 연극은 사뮈엘 베케트가 쓴 것이며, 카뮈의 사상에서 그 이름이 탄생한 「부조리극」의 대표적 작품이다. 부조리극에는 모순과 혼란, 비이성이 혼재되어 있으며 부조리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그러한 감정들을 느끼며 버림받은 존재로서 그려진다.

본작 『푸른 하늘의 카뮈』에는 「DJ 고도」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라디오 DJ로 등장한다. 해당 극의 작가마저 모른다고 공언한 존재인 「고도」를 이름으로 쓴 것은,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존재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DJ 고도는 호타루와 린의 상황을 이해한 듯 그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언급하고, 작가와 철학가들을 들먹이며 충고를 던지고 행운과 행복에 대해 논하는 전지적 시점을 보여준다. 등장조차 않는 원본의 「고도」와 달리, DJ 고도는 주인공 일행은 물론이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까지 안심시켜주는 존재라는 점이 비교되면서 흥미롭다.

호타루와 린이 그랬듯, 유저 역시 DJ 고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 충고와 격려를 전하는 잔잔한 목소리는 그야말로 빛 한줄기와 같았을 텐데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싯페이 타로』(しっぺい太郎)

일본 혼슈의 시즈오카현 이와타시에 전해지는 설화.
『싯페이 타로』

먼 옛날 한 신사에는 젊은 처녀를 바치는 악습이 있었다. 지나가던 한 스님이 슬퍼하는 마을 사람들의 사연을 들은 뒤 해결책을 고심하게 된다. 그는 처녀를 요구하는 괴물들이 「싯페이 타로에게 들키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싯페이 타로가 시나노노쿠니의에서 기르는 개임을 안 스님은 그 개를 빌려오게 된다.

다음 해의 제삿날을 맞이한 마을은 처녀 대신 싯페이 타로를 바치게 된다. 괴물이 제물의 관을 열자 그 안에서 뛰쳐나온 싯페이 타로는 거대한 원숭이의 형상인 괴물을 해치우게 되고 악습은 사라진다. 크게 다친 개는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지만 결국 죽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일본 시즈오카현 이와타시의 야나히메 신사에는 해당 개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

작중에서 DJ 고도는「거대 원숭이에게 당하게 되면, 그 동화를 생각해 내」라는 조언을 해준다. 하얀 개이며 종국에는 원숭이 괴물「히히」와 동귀어진하게 되는 사토 군에 대한 복선이다.

『쏙독새의 별』(だばかの星)

미야자와 켄지가 쓴 동화.
『쏙독새의 별』

못생겼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쏙독새는, 「밤매(夜鷹)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남의 이름을 왜 갖고 있느냐」며 매에게 갖은 협박을 당한다. 방황하던 쏙독새는 자기 자신도 벌레를 먹으며 살아감을 깨닫고, 매에게 괴롭힘을 당하듯 자신 역시 벌레를 괴롭힌다는 사실에 고뇌한다.

결국 그는 친했던 이들에게 최후의 인사를 건넨 뒤 계속해서 날아가고, 해와 별들에게 거부당하지만 끝내 별이 되었다.
사실 이 작품은「외압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물결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낸 일본인들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푸른 하늘의 카뮈』에서는 그보다「쏙독새가 별이 되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나?」라는 의문에 주목한다.
#호타루: "쏙독새는 최후에 별이 되었잖아. 그렇지만, 그 이야기에서 쏙독새가 별이 된다는 필연성은 없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별이 되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었잖아. 별이 되어도… 그건 그저 빛날 뿐. 그것 뿐…"
〔린은, 묵묵히 호타루의 이야기를 듣는다.〕
#호타루: "그러니까, 옛날에 읽었을 땐 몹시 슬퍼져서, 납득이 가질 않았어. 어째서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
#린: "잘 알아. 나도 그 기분. 나도 어째서 쏙독새가 거기까지 몰려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으니까."
〔호타루가 킥킥 웃었다. 푸른 하늘보다도 투명한 미소로.〕
#호타루: "그렇지만, 지금 린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어. 아- 의미라던가, 이유라던가. 그런 건 필요없었던 거야. 별이 빛나는 것에 의미란 필요없어. 그렇지만 쏙독새의 생각이 머무르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린: "그러니까, 풍차와 같은… 그런 거구나."
- 『쏙독새의 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호타루와 린
호타루는 풍차의 세계에 의미는 없지만, 린과 함께 풍경을 보기에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는 감상을 품는다.「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린과 함께라면 상관없다」라며, 그렇게 처음으로 태어난 생각을 안은 것이다.

이 대화는 카뮈의 두 가지 텍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인생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으나, 의미가 없기에 더욱 살 가치가 있다.
『시시포스 신화』- 알베르 카뮈
만약 의미를 지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는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지니는 것 역시 존재한다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알베르 카뮈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후자의 책을 저술했다. 의미가 없기에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의미가 있는 것 역시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호타루의 발언인 '의미라던가, 이유라던가, 필요없었다'는 전자의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만, '린과 함께'라는 발언에 방점을 두겠다면 후자의 의미가 더 가까울 것이다.

쏙독새의 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호타루. 그녀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생각이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 말한다.


시나리오: 행운과 행복

작중의 메인 테마 중 하나는 행운행복에 대한 고찰이다. 우선 작중의 자시키와라시부터 이야기해보자.
작중의 행운과 행복에 대한 해석 보기/접기
작중 대를 이어가며 존재하는 자시키와라시

자시키와라시

일본에서 자시키와라시(座敷童子)란, 일종의 수호신이나 정령 같은 존재이며 머무르는 곳에 복을 가져다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경우 기존의 거처는 망한다고 한다. 게임 내에서도 그 역할은 다르지 않지만, 전원 여자아이이며, 성장하여 초경을 맞이하면 점차 행운을 불러오는 힘이 약해져 간다는 점으로 차별화가 되어있다.

마을 주민들은 어떤 계기로 마주하게 된 자시키와라시를 임신시킨 뒤, 그 딸을 자시키와라시로 삼는 것을 통해 개념을 실체화시키고 현실에 고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변찮은 것도 없는 마을이 쇠락하지 않음은, 그 덕택이라고 한다. 오오모토는 그 선조격인 존재, 최초의 자시키와라시의 잔향 같은 것이며, 호타루는 가장 최근에 탄생한 자시키와라시이다.

마을 주민들은 호타루를 잇는 다음 자시키와라시를 만들기 위해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일로 방문하게 된 사토시를 붙잡아 연금시킨 뒤 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사토시는 큰 일그러짐을 지니고 있었고, 선대 자시키와라시와의 대담 이후 사건의 기폭제로 작용해버렸다. 즉 자시키와라시에 대한 집착이 본작의 이상사태를 포함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시키와라시 座敷童子
일본의 설화 등에서 전해지는 정령과 유사한 존재. 자시키(座敷)에 기거하며 그 집의 거주자들에게 장난을 치고 때로는 행운과 금전을 쌓도록 해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만약 자시키와라시가 집을 떠나면 그 집은 망하게 된다고도 한다.
서브컬쳐에서 신비롭고 밝은 느낌으로 쓰이는 때가 많은 것과 달리, 그 기원 중 일부는 섬뜩하고 기괴한 것들도 포함된다. 신, 불교적 존재, 저주, 학대받던 아이, 수호령 등등 다양한 추측이 있다.

자시키와라시를 붙잡는 행위

그런 행위에 대해 오오모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오모토: "모든 세계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그렇지만, 행운을 계속 두려고 하면 어딘가 일그러짐이 생겨. 모이고 쌓인 일그러짐은, 머지않아 무너져 내리지. 제방이 망가져 물이 흘러 넘치듯이."
#오오모토: "어느 사람에게 행운이 있다는 게, 다른 사람의 불행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 오오모토, 린과 호타루에게 자시키와라시에 대해 설명하며
오오모토의 설명에 의하면, 자시키와라시는 테이블보에 던져진 수구 같은 존재이며 평면을 뒤틀어 행운을 전해준다. 자시키와라시를 현실에 고정시키는 행위는, 구를 더 무겁게 만드는 것이며 무게가 증대함에 따라 평면은 더욱 뒤틀리게 된다. 결국 찢어지든 구멍이 나든 문제가 터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시키와라시를 억지로 붙잡는 행위는, 무게를 증대시켜 결국 테이블보(세계)를 뒤틀리게 한다.

행운과 행복의 차이

후반부에 DJ 고도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DJ 고도: "여기서 하나, 질문이다. 행운과 행복, 그 차이는 무엇일까? 행운이라 함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복권. 요즘이라면 레어 가챠? 그렇다면 행복은? 이것은 어렵다. 성공해도 정해진 것이 아니야. 승리는 영광을 보증하지 않는다. 아무튼, 성공한 사람이 전락해버린 이야기. 다들 좋아하지?"
#DJ 고도: "즉, 행운과 행복은 같은 의미가 아니며, 행운의 양과 행복의 양도 같지 않은, Inequality.... 부등이다."

〔이 라디오를 듣고 난 뒤, 마을 주민들이 어째서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 얘기하다가 호타루가 말한다.〕
#호타루: "행운은 어디까지나 Lucky한 일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만, 행복은 좀 더 개인적인 것이지요."
#린: "그래. 이런 귀찮은 일에 말려들다니, 그렇게 보면 우리 대단히 불행히 보이겠지만."
#호타루: "그렇지만, 나는 린과 함께 할 수 있어 지금은 행복해."
- 행복과 행운에 관한 작중의 이야기
린은 호타루에게 친구가 되어서 좋았다 말한다. 그녀와의 시간은 무척이나 행복했었다고. 이는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 나오는 마무리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산 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메우기엔 충분하며, 행복한 시시포스를 마음에 그려 볼 필요가 있다.
『시시포스 신화』- 알베르 카뮈
마을 주민들은 행운을 갈구했지만 결국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반면 호타루와 린은 부조리 그 자체를 겪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우정을 키워나가며, 함께 보낸 시간 자체를 행복하게 느꼈다.

다시 말해 「행운을 추구하는 것이 곧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

마찬가지로 DJ 고도의 이야기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DJ 고도: (전략) "그렇지만, 행복한 때를 느낀 적은 있겠지. 행복이란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면, 이미 그 때는 지나가 버렸을 거야. 최고의 시기는 정말 일순간이야. 눈치챈 후에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닐까."
- 행복의 순간에 대한 DJ 고도의 견해
호타루의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린 역시 이 시간이 매우 행복하다며 말한다. 사토시의 글리치가 뜨는 동안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날 사토시와 함께 있던 것. 우연히 와타스게가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던 것. 그것들은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 느낀 충족감은 행복이었다. 사토시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 린이 느꼈던 행복의 순간
행복한 시간은 지나가고 나서야 깨닫는다. 즉 행복한 순간을 그 순간엔 인지할 수 없으니 현실에 충실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헤르만 헤세의 명언〔Happiness is a how; not a what〕을 떠올리게 하며, 카뮈가 말하는〔인간은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와도 통하는 이야기이다.

그 고생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의심하거나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왔고 여전히 그렇다고 말한다.


시나리오: 캐치프레이즈와 엔딩의 해석

본작에서 제시한 캐치프레이즈「Qui a tué la fille」에 대한 해석과 작품이 맞이한 결말에 대해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캐치프레이즈와 엔딩에 대한 해석 보기/접기
Qui a tué la fille
누가 소녀를 죽였는가
- 작품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
클리어 후 해석의 도움을 위해서 홈페이지를 가 보았는데 캐치프레이즈가 Qui a tué fille였다. 카뮈가 프랑스인이기도 하고, 프랑스어인듯 하여 파파고에게 프랑스어를 물어봤는데 번역이 제대로 되지를 않았다. 이유를 찾아보니 관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Qui a tué la fille로 여성 단수 관사인 la를 fille(소녀)에 붙어주여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어쨌든 Qui a tué la fille의 뜻은 '누가 소녀를 죽였는가'이며 여기서 언급되는 소녀는 린이 틀림없다. 즉 그녀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표현해서, 자신이 말한대로 잔재로 남는 등 '완벽한 세계'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걸 살아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죽음이 타살인지 자살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릴 수 있다고 본다. 애초에 저런 캐치프레이즈를 넣었다는 것은, 메이커에서는 린을 누가 죽였는가? 에 대해서 플레이어가 고민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이것은 손쉽게 혹은 간단하게 보이는 해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된다.

게임은 묻기를 원한다. 누가 그녀, 린을 죽였는가?

호타루와 린의 차이

계속해서 린에 대한 우정과 호의를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호타루와 달리, 린은 선로에서의 컷씬과, 마지막 장면 외에는 자신 쪽에서 친구라는 말을 먼저 언급하지 않는다.

린은 외적으로는 강해 보일지 몰라도 내면적으로는 나약한 인물이다. 물건을 소중히 다루고 보관하는 성격에서 엿보이듯 깨끗함, 완벽함을 원하지만 자신의 삶은 그러지 못했고 남에게 쉽사리 표출하지 못하는 점 때문에 더욱 안으로 곪아간다.

반면 호타루는 허약하고 단련되지 않은 신체와는 반대로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으로 '공포를 이겨내는 용기'와는 다르게, 공포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하는 면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녀의 말은 린의 마음 속에서 공명하고 린의 마음을 흔드는 연출을 보여준다.

호타루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은 앞부분부터 표현되는데, 농부 좀비에게 돌진당했을 때도 그녀는 그저 혐오감을 느끼며, 눈에 들어온 존재를 살피고, 대화가 통하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을 판단하고, 자신에게 해를 가하려고 인식을 한 뒤에야, '혐오감' 대신 '공포'에 사로잡힌다.

린이 호타루에게 두렵지 않냐고 묻는 장면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호타루의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린의 질문을 듣고
#린: "호타루짱은, 무섭지 않아?"
#호타루: "나...? 나, 는...."
〔호타루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무서움'은 린과 다르다는 생각에 망설인다〕
#호타루: "무섭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나의 것은 린과 다를 거야."

글리치가 지나간 뒤
#호타루: "저 괴물들은 무서워. 마을 사람이 바뀐 것도.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위해를 가하니까, 무서워."
#호타루: "나,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지금까지 있던 일상을 잃는 게, 그렇게 두렵지 않아"
#호타루: "왜냐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 잃을 것도 없어"
호타루는 그저 위험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공포 그 자체가 아닌, 해악에 대해서만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이다.
린의 두려움

라디오를 듣던 도중
#린: "이제, 너무 멀어졌지, 지금까지 살고 있던 세계... 이 라디오처럼 벽의 이편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 반드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우리... 그렇게 생각하면, 무척.... 무서워...."

풍차의 세계에서
#린: "손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리는 것. 오빠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린은 자신의 손을 보며, 작은 손과 손가락임을 느낀다. 이런 손으로 지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반면 린은 닥친 사태에 대해서는 꿋꿋하게 대응하려 애쓰지만 그녀는 떨고 있다. 미지의 존재를 무서워하며,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 모습은 여느 인간과 다르지가 않다.

위험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호타루와 달리 린은 인간적인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상실(喪失)에 대해 무서워한다. 둘은 여러가지로 대비되는 것이다.

이렇게 호타루와 린은 여러가지로 대비된다.

호타루와 린의 서로에 대한 감정

그럼에도 둘이 함께하는 것은 서로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린의 호타루에 대한 감정 (1)

과거 회상 글리치
#린: (호타루는 이대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쭉- 맑은 채로)
〔린은 스스로 '맑은 채'라는 생각에 당황한다. 갑자기 솟아오른 듯한. 당돌하게 솟구친 생각.〕
#린: (무엇으로 나, 이런 제멋대로인 일 생각했을까.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니)
〔그렇지만 지울 생각은 없다. 훨신 소중히 보관하고 싶다는 기분. 이 앞으로도 호타루에게 그것을 털어놓을 일은 없지만, 린에게 있어 대신하기 힘든 보물이 된 것.〕

최후의 선로 씬
#린: "호타루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 깨끗한 호타루, 무엇보다 중요한 친구. 쭉 그대로 있었으면 해. 그것이 나의 소망. 그렇지만, 나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어... 누가 나쁜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나는 견딜 수 없었어... 나와 있으면, 호타루마져 다칠지도. 그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린은 자신의 손을 보며, 작은 손과 손가락임을 느낀다. 이런 손으로 지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린은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며, 호타루만큼은 깨끗하게 지키고 싶어한다.
린의 호타루에 대한 감정 (2)

풍차의 세계
#호타루: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나는 린과 함께하고 싶어. 나만은 린에게 예외이고 싶어."
〔호타루는 미소지었다. 희미하게 분홍빛을 띤 피부는 색상이 다른데도, 푸른 하늘과 같이 한없이 투명하다. 린의 뺨에서 한 가닥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흘린 눈물과 다르다.〕

후반 선로 씬
#린: "무엇을 믿으면 좋은 것인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을, 자신이 부정해 버리다니."
〔더 이상 자신은 계속 걸어갈 수 있을까나? 어떻게 충분히 움직이면 좋을까.〕
#호타루: "그럼 나를 믿어준다면 좋아. 봐, 나는 여기에 있어. 이 감촉만 믿어 준다면 좋다고 생각해. 그럼 안 돼?"
#린: (비유해서, 이것이 거짓말의 정보라도, 상관없어)
〔지금은 호타루가 함께 있음을 믿으면 된다.〕
#린: "나, 호타루짱의 친구가 되어 좋았어."
린은 호타루의 말에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그녀에게 친구가 되어 좋았다고 고백한다.

"나, 호타루짱의 친구가 되어 좋았어."
린의 솔직한 감상이 드러나는 대사이다.


그렇다면 호타루는 어떨까? 호타루 역시 린에 대해서 깊은 감정을 안고 있다.
호타루의 린에 대한 감정

폐건물에서
〔조용히 호타루는 생각한다. 자신이 자시키와라시. (중략) 자시키와라시의 힘을 잃어, 인간이 된다는 것... 자신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실감조차 없다. 그것은 매우 무섭게 느껴진다. 불안해진 호타루는 조금 몸을 흔들어 린의 감촉을 실감한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린의 몸.〕
#호타루: (린이라면 반드시- 내가 변화해도 나의 존재를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런 확신을 하는 호타루. 린이 가족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자신은 바뀌어도 받아들여 준다고 생각했을까? 제멋대로인 도리같지만.. 이건 도리나 도덕관이 아니다. 이중기준이라도 좋은, '린'은 나를 받아들여준다. 린이 있으면 괜찮아. 그말은 호타루의 가슴 속에서 따듯한 램프의 등피처럼 빛났다. 천천히 차갑고 어두운 불안을 비추어, 어둠이 사라져간다.〕
#호타루: (린과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호타루가 린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의 불안을 물리친 순간, 일시적으로 밖이 맑아지며 푸른 하늘이 드러나는 연출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타이틀에도 언급된 문구인 I opened myself to the gentle indifference of the world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호타루의 독백과 연결되며 배경이 바뀌는 연출


그녀는 린에 대해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 린이라면 자신을 받아들여 준다. 린이 있으면 괜찮다. 그런 생각은 호타루가 갖고 있던 불안과 어둠을 지우고 그녀의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서로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곳에서 다른 풍경을 본다

글리치를 통한 과거 회상에서는 둘이 닮은 생각을 안았기에 친해졌다고 표현되고 호타루와 린은 부조리에 저항하는 과정을 통해 우정을 쌓고 연대감을 느꼈지만, 결국 서로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서로를 소중히 여긴 사토시와 린의 생각이 엇갈린 것처럼 말이다.
푸른 문의 집에서
#린: "역의 홈에서 풍차를 많이 본 것 같아."
(호타루는 그녀의 말에 의문을 갖는다. 풍차?)
#오오모토: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진실이 되었구나. 저것은 단순한 환상. 그러나 무수한 선택지 중 당신이 이끌어낸 진실이 돼."
#호타루: 아무것도 없었다면요?"
#오오모토: "선택해서 취해야 할 것이 없었던 거야."
〔그 말은 호타루의 마음의 톱니바퀴에, 불안으로 남는다. 자신은 여태 무엇하나 선택하는 일 없이. 망양하며 보낸 것일까.〕
〔마치, 푸른, 푸른 하늘만의 퍼즐 피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푸른 하늘에, 푸른 하늘의 조각이 빠진 듯. 공허한 구멍에 공허의 조각이 끼워진 것처럼.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인식했다〕
- 오오모토, 린과 호타루에게
린은 이미 풍차의 세계를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보였고, 무의미하지만 도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존재에 이끌렸다. 반면 호타루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선택해서 취해야 할 것이 없었다는 오오모토의 확인사살까지 받는다.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의 지향점은 어긋나 있으며, 결말도 다를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풍차의 세계」는 존재에 의미는 없지만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은유이다.

린의 심정

우선 게임 내적으로 보자면 린은 스스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것이 현실 세계에서 보기에는 카뮈가 말한 '물리적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린의 삶은 이미 만신창이였으며 모두 그녀의 직접적 잘못이 아님에도 겪게 된 괴로움, 즉 '부조리'다.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방치되고, 좋아하는 오빠와도 소원해진데다, 모친에게는 버림받았다. 그리고 뒤틀린 세계에서 그 좋아하는 오빠는, 자신 때문에 자아가 분열되고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자신의 애매한 태도가 모친을 달갑지 않게 했고 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했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는 엄청난 치명타였다. 풍차에서 노트를 줍고, 진상을 알게 된 린에 대해서는 이런 묘사가 있다.
〔린은 눈시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텅 비었다. 호타루가 좋아했던, 밝은 린의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빛남. 그것이 사라져, 그저 속이 비어있는 유리구슬이 되고 만 것에, 호타루는 공포를 느꼈다〕
- 호타루의 눈에 비춰진 생기없는 린
그녀는 내몰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 것이다.

'표'와 전철의 탑승조건

중반에 린이 오오모토에게 전철이 언제 오는지를 물어보며 표의 이야기를 꺼낸다. 호타루는 그 말을 듣고 가슴에서 움찔함을 느끼고, 기분이 나빴다고 하는데 어쨌든 그 시점까지만 해도 린은 표, 그러니까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엔딩에서 호타루는 문제없이 전철에 올랐으며, 실제의 전철 마냥 짧은 시간 뒤 바로 출발해버렸다. 게다가 호타루와 린이 서로를 향해 힘껏 손을 뻗는데 잠시 뒤 손은 떨어져 버린다. 오오모토는 이미 린이 표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현실로도 돌아갈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표와 별개로, 행선지 자체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오오모토의 언급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은 자기 자신이 말했듯이 나약했고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호타루가 '함께 돌아가자'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린은 그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호타루가 전철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시선을 푸른 문의 집에서 떼지를 못했다.

어째서 잡았던 손이 떨어졌는가

맞잡았던 손이 떨어지는 장면


말미에서 두 사람의 손이 어째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대략 3가지 경우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린이 놓은 것이다.
호타루가 놓은 것이다.
어떤 제 3의 억지력이 작동하여 손을 떼어 놓았다.
일단 첫 번째 추측「린이 놓았다」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면 린이 손이 떨어지는 상황에 대해 놀라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해당 장면의 CG는 호타루지만, 대사 자체는 린이다. 게다가 린의 동공이 커진다는 묘사가 이어지는 것을 볼 때 린이 놀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신의 무의식이 부른 결과에 놀랐다」라고 어떻게든 이어 볼 수는 있겠으나, 린과 같이 독백에서도 수 차례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가 자신도 모르는 본심을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추측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추측「호타루가 놓았다」는 어떨까? 첫 번째와 달리 이것은 나름대로 붙여줄 근거가 있다. 작중에 언급되는 '소원을 들어주는 방'의 대상은 사토시였으나, 만약 이 은유가 호타루에게도 적용된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린과 함께 돌아가고 싶다」를 늘상 말하던 호타루지만 내심 완벽한 세계에 대해 동경을 품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완벽하지 않은 린을 배제하려 들었다, 라고 말이다.

호타루는 린에 대한 감정들을 포함해서 자신의 생각들을 구체화하는 데 능숙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작중에서 그에 대해 깨닫는 묘사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게다가 그녀는 일반적인 인간과 다른 면모가 많다. 게다가 다음의 대사는 이 추측에 대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
#호타루: (얼마나 아름다운지... 완벽한 세계)
- 린과 맞잡은 손이 떨어진 직후 호타루의 독백
손이 떨어진 그 순간, 호타루는 린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감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이 대사를 통해 호타루는 린을 잃은 상실감 이상으로, 갓 완성된「완벽한 세계」에 대해 긍정적 감정을 품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추측을 택한다면, 린이 배제되었기에 완벽해진 세계인지, 린과 합쳐졌기에 완벽해진 저쪽 세계인지는 정확히 알 바가 없지만 어느 쪽이든 시궁창인 세계가 더욱 고약한 맛을 내는 것이기에 지지하기엔 좀 슬퍼진다.

호타루는 자격을 유지했고, 린은 자격을 잃었다

세 번째 추측「제 3의 억지력이 발동했다」는 가장 합리적이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기에 자세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이에 대해 알기 쉽게 말하자면 '린은 탈 자격을 잃었다'라는 것이다. 이때 표(자격)을 얻는 조건은 '행복에 대한 소망'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가령 호타루는 린과 어디로든 가는 것이 최대의 소망이었다. 그 중에서도 현실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등장한 전철은 현실행이었을 것이다. 호타루가 린을 받아들이며 인연을 강하게 느낀 순간 창 밖이 푸르게 맑아지는 연출도 그렇고, 그녀는 이미 린과 함께 돌아가려는 강한 동기가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린은 현실행 전철에 탈 자격을 상실했다. 그 이유는 크게 셋 정도가 있을 것이다.
① 사토시를 영구적으로 잃게 되면서 '사토시와 함께 한다'는 진짜 행복의 가능성 역시 영구적으로 소실되었다.
② 요모츠헤구이로 인해 린은「푸른 세계」의 주민이 되어버려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③ 자신의 존재가 주변에 해를 끼친다 인식했고, 그래서 호타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원했다.
호타루와의 대비를 생각해 볼 때 ①과 ③이 메인이며, ②는 보조적 연출 및 복선 정도로만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린은 사토시도 없고 부모도 없이 껍질만 남은 집이 있는, 현실로는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위해 호타루가 수없이 설득한 것이지만「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라고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린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기력이 없었다. 린은 이미 자신의 존재 때문에 부모와 사토시를 잃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토시와 별개로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호타루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 린은 호타루와 실체를 지닌 채 함께 하는 것이, 린 자신의 진심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이 추측을 따르면 호타루가「풍차의 세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고 했을 때 린이 응답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사토시는 생존해 있었고, 그녀에게는 사토시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둘은「바라는 것이 길이 되는 곳」에서, 서로 다른 풍경을 본 만큼 목적지 역시 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린의 양자화?

린은 마지막 호타루와의 대담에서 양자역학 이야기를 하며, 정보로서 남는다면 언제나 함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린과 헤어지는 씬을 보면 주변에서 무수한 평행사변형이 휘날리는 CG를 배경으로 하체부터 희미해지는 연출을 하는데 이것이 양자화하는 린에 대한 암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때 린이 입을 작게 벌려,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멀어지는 부분에서는 미소를 띠는 것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체념이라 볼 수도 있지만, 호타루를 깨끗한 채로 두겠다는 자신의 소망을 이룬 반응일지도 모른다.

후자를 택한다면, 비록 사토시와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의 소원이기도 했고 자신도 호타루에게 안은 감정이었던 '소중한 것을 깨끗한 채로 두고 싶다'를 지켰다는, 감성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린은 최후에 미소를 짓는다는 점도 여기에 신빙성을 더한다.

아련하게 호타루를 바라보던 린은 최후에 미소를 짓는다.

Qui a tué la fille - 결국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여기까지 알아봤다면 이제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린은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고, 자신이 현실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이별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사랑하는 오빠와는 사이가 소원해졌다. 부친은 진작에 떠났고 모친마저 자신을 버렸다. 그리고 결국 오빠는 자신에 대한 갈등 끝에 사망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린이 원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그렇게 되도록 조장한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답은 하나뿐이다. '부조리'다. 이런 상황에서 최후의 일격을 누가 가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게 린 자신이든, 호타루의 무의식이든, 혹은 세계이든. 우연을 거듭한 끝에 린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살아갈 기운을 빼앗고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 것은 부조리 말고는 없는 것이다.

사라진 오오모토와 창문이 없어진 푸른 집

오오모토의 이야기 중

과거 오오모토가 만났던 한 청년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를 붙잡아 '의식'을 강요하고 있었지만 그는 오오모토에게 손대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여동생과 닮았다며 그녀를 소중히 여겼고, 애정의 징표로서 수구를 준 청년은 결국 그녀를 억지로 아는 것을 거부한 채로 떠났다.

오오모토는 어째서 청년이 자신을 거부했는지 해답을 낼 수 없었다. 대신 수구를 소중히 지니고 있으면서, 세계의 틈에서 떠나지 못했다. 결국에는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수구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지금까지 온 것이다. 누군가 그에 대해 내어 줄 정답을 언제까지나 기다리면서.
'소중한 것은 어째서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오모토는 린과 사토시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내는지 보고자 했다.

그녀는 사토시와 대화한 끝에 정답을 보았다. 바라는 것도, 바라지 않는 것도 모두 사랑의 형태임을 안 것이다. 자신이 그 청년에게 가졌던 감정과, 그 청년이 자신에게 안았던 감정 모두 사랑임을 자각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타루와 린은 오오모토와 재회했을 때 그녀가 변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고, 그녀가 진정한 의미로 자신들을 받아들여 준다고 느꼈다.

의문을 해결한 오오모토는 떠났고 남겨진 집의 문과 창은 없어졌다. 어째서 집 전체가 아니라, 문과 창문이 소멸한 것일까?

눈은 마음의 (窓)이라고도 한다. 눈은 상대를 살피고 동시에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의사소통 기관이며,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눈이 없는 괴물들이 일방통행으로 상대를 밀어붙였던 것을 떠올려보라. 이 점을 기억하고 다음의 텍스트를 눈여겨 보자.
〔전철 바닥에는 좌석의 푸른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차내의 광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제 이 세계에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것은 그 푸른 문이 없어진 집의 모습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호타루가 전철에 올라탄 직후의 감상
「전하고 싶었던 것이 없어졌다」라는 묘사가 눈에 띈다. 세계를 향했던 그녀의 의문이 담긴 눈길은 사라졌고, 그 상징인 문과 창문 역시 사라졌다. 그녀의 유산은 마치 달팽이와 같이'집'만이 남았다. 앞서 살펴본 문학 작품『달팽이의 슬픔』을 떠올려 보면, 이는 오오모토가 슬픔이 가득한 껍질(집)에서 해방되어 떠나고 그 잔재만을 남겼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린은 미련없이 전철에 올라탄 호타루와 달리 계속 그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에 빠진다. 어쩌면 그녀는 이 단락의 내용과 비슷한 무언가를, 그녀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오모토가 해방되어 떠난 과정과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요모츠헤구이를 한 일종의 계승자로서.

그녀도 가야 할 곳으로 간 것 뿐이다.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시나리오: 『은하철도의 밤』과의 연관성과 메시지

시나리오 분석의 종착점은 줄거리의 모티브로 추정되는『은하철도의 밤』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본작의 시나리오는, 작중 언급되는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작품과 매우 닮아있다. 해당 작품은 일본 소설가인 미야자와 겐지(宮沢 賢治)가 쓴 소설로,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 의지를 다룬다. 나도 잘 몰랐지만,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며 수많은 재창작을 거쳤고 은하수를 기차로 둘러본다는 아름다운 심상이 여러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은하철도의 밤』(銀河鉄道の夜)

현실에서 고독한 주인공 조반니는 친구 캄파넬라와 난데없이 은하 철도의 열차를 타게 된다. 조반니는 친구 캄파넬라와 함께 은하수를 여행하며 많은 이들을 만나고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캄파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종적을 감추고, 현실에서 깨어난 조반니는 캄파넬라가 타인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듣는다.
이 소설은 저작권이 이미 소멸되었고 아오조라 문고(青空文庫)에서 무료로 공개하고 있기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읽어볼 수 있다. 『은하철도의 밤』은 현실에서 시작해서, 꿈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다시 현실로 회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은하철도의 밤』과의 비교와 의미 보기/접기 복습 차원에서 본작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실의 호타루와 린이 전철을 타고 돌아가던 중
기이한 세계와 조우하고 원치 않는 여행을 한다
여행의 끝에 호타루와 린은 이별한다
호타루 혼자 현실로 돌아온다

두 작품의 비교와 의미

이쯤 왔으면 다들 눈치챘으리라고 생각한다. 게임에서는 중간중간 여러 요소들로 비틀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얼개가 해당 소설과 매우 닮아있다. 직접 비교를 해 보면 이렇다.
현실에서 고독하게 살아온 호타루 (≒고독한 조반니)
호타루가 친구 린과 난데없이 조우한 기이한 세계를 탐험 (≒은하수 기차 여행)
여행 끝에 린이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종적을 감춤 (≒캄파넬라의 이별)
호타루만 현실로 귀환 (≒조반니의 귀환)
린이 하는 대사는 "나는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견딜 수 없어. 나와 함께 있으면 호타루까지 더럽혀질거야"이며, 캄파넬라가 하는 대사는 "엄마가 날 용서해 주실까? 잘 몰라도 누구나 진심의 선행을 한다면 행복할 거야. 그러니 엄마는 날 용서해 주실거야" 이다. 그 형태는 많이 다르지만 둘 다 이타심을 기조로 하고 있다. 다만 캄파넬라는 그 감정을 조반니에게 향한 것이 아니며, 린의 경우에는 호타루를 의식했다는 점이 차이.

작품이 제시하는 메시지의 유사성마저 공통의 요소가 있는데, 『은하철도의 밤』에서 조반니가 캄파넬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은 '삶과 죽음은 동반자이며, 살아남은 자들은 늘 모두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푸른 하늘의 카뮈』에서 호타루를 통해 던져주려는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께 날린 비행기를 조우한 뒤 눈물을 흘리는 호타루


엔딩에서 호타루는 린과 날렸던 종이비행기를 만나고, 눈물을 한 줄기 흘린다. 이 눈물은 린의 상실에 대한 자각이며 앞으로의 어려움에 대한 상기를 뜻한다. 결국 작품이 전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다.

린을 잃었지만, 그녀(호타루)는 살아가고 또 나아갈 것이다.


특장점

깊이있는 테마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이라는 철학적 소재를 다양한 문학 작품을 곁들여서 풀어냈다. 덕분에 분량 자체는 길지 않으나 강렬하고 여운이 오래가는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본토 유저가 아니라면 쉽지 않겠지만, 심어놓은 다양한 문학적 모티브들을 찾아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작중에서 다루는 굵직한 주제만 해도 다음과 같다.
카뮈의 철학에 기반을 둔 부조리의 인식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저항과 의미
의미없는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
행복과 행운에 대한 고찰
상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 자신의 최선을 택하는 것 - 어느 것이 사랑인가?
이게 어딜봐서 미소녀 게임이냐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오한 주제들이 게임 전체에 가득 차 있다.

신비스런 분위기와 수려한 음악

텍스트를 통해「푸른 세계」의 이미지를 그럴듯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아름답고 처연한 BGM은 여기에 날개를 달아준다.

절제된 복선과 정돈된 이야기

무의미하게 남발되는 복선이 거의 없으며 맥거핀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이야기 시작부터 끝까지 잘 다듬어진 줄거리는 그리 길지 않음에도 확실한 임팩트를 보여준다.

아쉬운 점

난해한 주제

대중성의 측면에서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요인.「부조리관」이라는 어려운 철학 소재를 택한 것만으로도 난이도가 높은데 작중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각종 문학 작품들을 통한 은유는 더욱 해석의 난이도를 높인다.
카뮈의『이방인』,『시시포스 신화』,『페스트』,『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장 폴 사르트르의『구토』
에마뉘엘 레비나스의『타인의 얼굴』
미야자와 켄지의『구스코 부도리의 전기』,『쏙독새의 별』,『눈길 건너기』,『은하철도의 밤』
니이미 난키치의『달팽이의 슬픔』,『장갑을 사다』
사뮈엘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
일본 신화와 설화.『자시키와라시』,『싯페이 타로』,『이자나기 신화』등이 포함
이게 다 뭐냐 싶을 만큼 다량의 철학, 문학 작품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으며 실제로 그 모티브를 차용하여 인물에 부여되거나 줄거리에 반영되는 등 작중에서 쓰이고 있다. 이런데도 어렵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짧은 분량에 난립한 테마

짧은 분량에 워낙 많은 주제들이 들어가있다 보니 설명의 불충분은 필연적이다. 덕분에 앞서 이야기한「난해한 주제」의 문제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해석을 더욱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취향을 타는 CG

배경만 보면 실사에 근접한 수준의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주지만, 인물 작화는 미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너무 동글동글한 인상을 주는 탓에 작중의 신비함과 무게감을 낮춘다는 문제가 있다.

게임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

글이 너무나 길어졌기에, 이 게임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추측되는 것들을 다시금 정리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게임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작지만 의미있는 복선들

호타루가 장식하고 있는 금잔화의 꽃말은 '이별의 슬픔, 비탄'이다. 사토시와 린의 추억인 와타스게(ワタスゲ)의 꽃말은 흔들리는 마음(揺らぐ想い)이다.

린과 사토시가 와타스게를 보는 장면

소중한 것은 어째서 그대로 두지를 못할까

오오모토는 소중한 것을 그대로 두려는 청년에게 거절당했다. 사토시는 소중한 것에 대한 갈등으로 쪼개졌고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러나 사토시와 오오모토가 최후에 깨달았듯이, 소망하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모두 사랑이었다.

오오모토는 긴 기다림 끝에 이루어지지 않은 그 형태도 역시 사랑임을, 사토시 역시 비록 그런 결말에 이르렀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을 알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삶으로 보일지 몰라도, 분명 그들의 존재에는 의미가 있었으며 그들은 소중한 것에 대해 '사랑'하고 있었다.

린은 호타루라는 소중한 것을 그대로 두고자 하는 소원을 위해, 호타루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도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순수함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깨끗함과 상처투성이 - 양립 가능한 아름다움

작중에서 아주 짧게 언급된, 눈길 건너기(雪渡り)와 장갑을 사다(手袋を買い)를 여기서 쓸 수 있을 것 같다.『눈길 건너기』에서 아이들은 외적인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으며,『장갑을 사다』에서 엄마 여우는 사람은 어쩌면 정말로 착한 것일지도, 라는 생각을 한다.

오오모토는 깨끗한 호타루와 상처투성이의 린 양쪽 모두 아름답다고 말했다. 사토루는 고뇌한 끝에 선악으로 갈라졌지만, 뒤틀린 마을의 주민들과 사악한 존재인 히히마저 그 본질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못생겼으나 하늘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는 쏙독새. 그 겉모습과 달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은 아름답다고 전한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마을 주민들은 자시키와라시를 고정시키는 행위로 행운을 갈구했지만 결국 행복할 수 없었다.

반면 호타루와 린은 우연이 만든 부조리 하에서 심신 양면으로 괴로운 여행을 하면서도, 그 사이에 우정을 키워 나갔으며 그 시간 안에서 소중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행운이 반드시 행복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행복은 있다. 호타루와 린이 풀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때. 린이 사토시와 흩날리는 와타스게를 보았을 때처럼, 찰나의 순간 분명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DJ 고도의 이야기처럼 행복은 결국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세계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간다.

린은 세계가 무심한 거인이며, 개미와 같은 인간은 그 제멋대로인 움직임에 좌지우지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힘껏 살아간다고 말한다.
삶에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인간은 부조리를 마주한 뒤에도 저항과 자유, 열정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 알베르 카뮈
호타루는 린과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작중 노래의 가사처럼, 잃은 것이 아니다. 린의 마음을 담아 날렸던 종이비행기가 현실에서 호타루에게 닿았듯이. 캄파넬라를 잃은 조반니가 현실에서 살아가듯이 린을 잃은 호타루도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종이비행기는 인간의 힘 없이는 날지도 못하며, 멀리 갈 수도 오래 떠 있을 수도 없다.「부조리관」에서 말하는 한 개인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무의미하고 나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함께 비행기를 날렸기에 그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홀로 남아 종이비행기를 맞이한 호타루는 눈물을 흘렸음에도 그를 줍기 위해 발을 뻗는다. 연대하고 뜻을 계승함으로서 인간은 부조리에 저항할 수 있다는 카뮈의 철학이 떠오르는 부분.

어떤 부조리를 겪더라도 인간은 나아가야만 하고 능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 호타루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 같다.


『푸른 하늘의 카뮈』총평

문학과 사상을 소재로 하여 '부조리 앞의 인간'이라는 철학적 테마를 그려낸, 짧지만 굵은 게임.

아름다운 배경과 양질의 음악은 게임의 몰입감을 더하고, 세심하게 구성된 연출이 게임의 매력을 더한다.

다만 거기에 힘을 너무 많이 쏟은 탓인지 총 플레이시간은 수 시간에 불과해 분량은 적은 편이다. 그리고 그 짧은 분량 속에 너무나 많은 테마가 난립하는 탓에 내용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기에는 설명이 불충분한 점도 아쉽다.

그러나 앞의 단점들을 감안하더라도, 미소녀 게임 시장에 다양성을 안겨주는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것부터가 게임 내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작중의 사고관과 메시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삶의 방식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하게 하고, 그 고민 뒤에는 가슴 한켠에 여운을 남겨주는 진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글은 2022.01.09 게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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