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마법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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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Uguisu Kagura에서 2014년 12월 19일 발매한 미소녀 게임 『종이 위의 마법사』 (紙の上の魔法使い, 카미마호)의 분석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 부분 은 기본적으로 접혀있으니 펼쳐서 읽기 전 주의 바랍니다.
리뷰에 사용된 CG의 모든 권리는 게임 제작사인 ウグイスカグラ에 있습니다

『종이 위의 마법사』리뷰

제목: 종이 위의 마법사(紙の上の魔法使い, 카미마호, かみまほ, kamimaho)
제작사: 우구이스 카구라(ウグイスカグラ, Uguisu Kagura)
작가: 루쿠루(ルクル, rucle)
속성: 미소녀 게임, 미연시, 에로게, 스토리게, 판타지, 책


목차

01. 게임 소개 및 한글패치
02. 요약
03. 도입부
04. 소재
05. 작품 구성
06. 캐릭터 디자인과 보이스
07. 텍스트
08. 원화
09. 서비스신/H신
10. 음악
11. 시스템
12. 시나리오 파트 1 : 인물별 분석
13. 시나리오 파트 2 : 게임의 해석
14. 사족
15. 총평

표시가 붙어있는 부분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펼쳐서 읽기 전 유의 바랍니다.



게임 소개

종이 위의 마법사

원제: 紙の上の魔法使い
영제: (음차) Kami no Ue no Mahoutsukai
별칭: 카미마호(かみまほ, kamimaho)
2014년 12월 19일 Uguisu Kagura에서 발매한 미소녀 게임. 2019년에 같은 제작사의 게임인 『수장은화의 이스테리아』와 합본 한정판이 발매되었다.


한글 패치

팀 Myskrpatch에서 제작한 『종이 위의 마법사』의 한글 패치가 2021년 10월 18일 공개되었다. 아래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https://myskrpatch.tistory.com/177
「종이 위의 마법사 한글패치 + 모바일 이식」

위 사이트는 아래의 목록을 제공한다.
- 패키지판 1.6 업데이트를 포함한 한글패치
- 버그 및 오타 제보 포스트
- 키리키로이드를 이용한 모바일 이식 가능


요약

호불호를 타는 시나리오 하나로 승부하는 스토리게.
『종이 위의 마법사』는 텍스트 어드벤쳐보다 소설에 더 가까운 「읽을거리」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매 챕터마다 준비된 장치들이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며 재차 기능을 하도록 짜여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인물에 몰입하기 쉽지 않으며, 연출이 빈약하다는 단점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 속내는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플롯과 메타포로 점철되어 있고 해석은 온전히 플레이어의 몫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내 경우에는 꽤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고약한 면이 있기에 함부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텍스트를 성실하게 읽고, 이야기를 섬세하게 복기한 끝에 안는 감상은 씁쓸하면서도 독특한 풍미가 있다는 것이다. 떫은 맛이 취향이라면 해봄직한 작품이다.

도입부

"그대와 책과의 사랑을 하자"
주인공 시죠 루리(四條 瑠璃)는 여동생 키사키와 함께 2년만에 「섬」의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유교지 요루코라는 소녀를 위해 지어진 그 도서관은 그녀에게는 가장 행복한 장소다. 쓸쓸하던 도서관은 예전처럼 북적이게 되었으나 과거와 달리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마법의 책에 쓰여진 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캐치프레이즈의 원문은 "キミと本との恋をしよう"이다.


본작의 배경이 되는 도서관

소재

소재를 파다보면 스포일러와 자연히 엮이게 되기에 여기서는 최소한으로 설명.

현실 개변

마법사와 마법의 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마법의 책이 펼쳐지면, 쓰여진 대로 현실을 바꾸게 된다.

사랑

작품 전체의 소재 중 하나이다. 그야 미소녀 게임이니까 당연히 포함되겠지만, 일반적인 연애담의 수준이 아니라 「진짜 애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게임 전체를 통해 논하고 있다.

히키코모리

히로인 중 하나이자, 핵심 인물인 요루코는 자신을 위해 지어진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책만 읽으며 살아온 「히키코모리」다.

히키코모리 : 한국어로 비하적 의미가 없으면서 가장 무난한 표현을 찾자면 "은둔형 외톨이". 집에 틀어박혀 장기간 사회와의 접촉을 극도로 기피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본어다.

작품 구성

플레이타임

총 플레이타임은 약 30~40 시간이다. 이해를 위해 앞의 내용을 복기하는 경우, 훨신 더 길어질 수 있다.

진행과 엔딩

『종이 위의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챕터 1부터 챕터 13까지 쭉 진행되는 일직선 구조이나, 중간에 개별 루트로 빠질 수 있으며 그럴 경우에는 해당 챕터 내에서 게임이 끝난다. 초회 특전으로 제공된 스페셜 시나리오는 올 클리어 후에 확인이 가능하다.
각 히로인마다 1개의 엔딩이 존재한다.

추천 순서

앞서 설명한 대로 일직선 진행에서 분기로 갈라지는 구조이고, 순서 자체가 일종의 스포일러 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깔끔한 플레이를 원한다면 공략을 보는 것이 좋다. 해당 히로인의 개별엔딩을 건너뛰고 진행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떡밥이 산재해 있으므로, 온전하게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전부 플레이하는 것이 좋다.

캐릭터 디자인과 보이스

시죠 루리 (四條 瑠璃) 돌아온 주인공

작품의 주인공이며 주 화자. 얼굴은 따로 설정되지 않았으며 스탠딩/페이스 CG도 없다. 말과 행동에 여유가 있으며 여동생을 아끼는 시스콘이다.

유교지 요루코 (遊行寺 夜子) 도서관의 히키코모리

CV: 타치바나 미오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기거하는 히키코모리 소녀로 자존감이 낮고 겁쟁이다. 주인공 루리를 적대시하며, 타인에게 무례하게 굴 때가 잦으나 주인공을 포함한 주변에선 그런 태도를 이해해 주고 있다.
프릴 케이프, 흰 블라우스와 2단 프릴 롱스커트를 입고 있으며 헤어밴드를 차고 있다. 작중에선 백발 적안(赤眼)으로 묘사하는데 CG를 보면 눈의 색은 바이올렛이다.
속성: 히키코모리, 독설, 책벌레, 반사회적, 무례

츠키야시로 키사키 (月社 妃) 주인공의 여동생

CV: 미소노 메이
늘씬하고 슬림한 체형의 소녀로 주인공의 친동생이다. 이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다. 본심을 숨기는 데 능하며 감정을 내색하는 경우가 드물다.
복장은 앞가리개가 있는 세일러 스타일의 교복이 기본이며 팬티스타킹을 신고 있다. 녹안(綠眼)에 금발의 롱헤어.
속성: 여동생, 지적, 무례, 표리부동(表裏不同)

후시미 리오 (伏見 理央) 요루코의 수행원

CV: 히메하라 유우
유교지 요루코를 시중드는 수행원. 낙천적이고 느긋한 성격을 하고 있다. 요리가 매우 능숙하다. 유교지 가의 가사 전반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장은 스트랩 오프숄더 블라우스에 큐롯 스커트, 스테이업 스타킹. 헤어스타일은 갈색의 당고머리이며 눈 색도 브라운이다.
속성: 유사메이드, 3인칭, 순진, 친절, 외유내강(外柔內剛)

히무카이 카나타 (日向 かなた) 학급 친구

CV: 하나자와 사쿠라
잘 웃고 활발한 소녀로 주인공의 반 친구다. 호기심이 많고 늘 기운이 넘친다. 전학 온 주인공에게도 지대한 흥미를 보이며 친해지고 싶어한다. 요루코와는 반대로, 카나타는 초면에도 친근하게 군다.
핑크의 롱 헤어를 리본과 핀으로 장식하고 있고 자신의 눈 색과 같은 푸른 보석 넥클리스 를 차고 있다. 가터벨트 스타킹 착용.
속성: 반 친구, 호기심 많음, 친절, 활발, 똑똑함, 세련됨

혼조 미사키 (本城 岬) 학급 친구

CV: 야하타 나나미
또 다른 주인공의 반 친구로, 때때로 말을 걸곤 한다.
헤어는 검정에 가까운 바이올렛의 숏 포니테일이다. 앞머리를 흰 핀으로 장식했고, 푸른 리본을 매고 있다. 눈은 보라색.
속성: 반 친구, 호기심 많음, 친절, 지적, 세련됨, 메타발언
이 캐릭터는 비공략이다. 헛된 기대를 품지 말자.

텍스트

시나리오를 담당한 루쿠루는 서정적인 문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묘사에도 일가견이 있다.
오탈자 관련

초회판에는 오자가 꽤 있기에 원어인 일어(日語)로 플레이할 유저라면 거슬릴 수 있다. 제작사에서 1.6 수정 패치를 제공하니 불편하다면 사용하면 된다. 단, 해당 패치는 특전 시나리오 제공 패치와 충돌하는 버그가 있으므로 주의. 원어 플레이를 하겠다면 다음과 같이 진행하면 된다.

1) 1.6 패치를 하고 본편을 끝까지 한 뒤, 세이브를 백업한다.
2) 게임을 재설치하고 곧바로 특전 패치를 씌운 뒤 세이브로 다시 클리어를 한다.
이 때는 1.6 패치를 해선 안 된다.
3) 스페셜 시나리오가 개방된다. 오류 없이 정상적으로 플레이된다.
한글패치를 사용할 거라면, 해당 파일에 1.6 패치가 포함되어 있으니 위의 번거로운 과정 없이 게임 설치 및 한글패치 설치만 하고 플레이하면 되는 것 같다.

원화

키리하 메인, 하기노 코우타 채색. 두드러지는 면은 없지만 무난하다. 여담으로 키리하의 화풍은 후속작에 이르러서 꽤 바뀌었다.

화풍이 부드럽고 따듯한 인상을 남긴다.

서비스신 / H신

H신에서는 약간의 복선이 제공되나 중요하진 않다. 특히 종장에 이르면 경위부터 뜬금없고 분위기를 깬다고 느껴질 만큼 어색하다. 굳이 쓸모를 찾자면 그 루트 히로인이 누구인지 재확인하여 진히로인 후보 리스트를 갱신하는 정도.

플레이하다보면 서비스든 H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본작은 명백한 스토리게이므로.

사운드

배경 음악

구성은 피아노와 관현악기 위주로 총 20곡이 준비되어 있으며 모두 양질이다.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곡을 꼽자면 1번의 eden of the birdcage와 10번의 조용한 결의(靜かな決意).

그럼에도 크게 다가왔던 단점을 하나 꼽자면 카타르시스 신에 적합한 강렬한 곡이 없다는 것이다. 글에 집중하란 의미로 그랬을지도 모르겠으나 본작은 어디까지나 텍스트 어드벤쳐이지 소설은 아니다. 연출의 부재와 맞물려 아쉬운 점.

밸런스와 별개로 좋은 곡들이 많다.

OP, ED

상업작임에도 오프닝곡과 엔딩곡이 아예 없다. 오프닝은 그렇다 쳐도 감동을 배가시키고 여운을 남기는 수단인 엔딩곡을 포기했다는 것은 다소 의아한 선택이다.

SE

SE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1장 도입 극초반부에는 시계소리, 갈매기 소리, 책을 넘기는 소리 등 SE가 멀쩡하게 들어있다.

시스템

편의성

신 점프가 없어서 여러모로 불편하다.

복선과 메타포가 넘쳐나는 작품 특성상 여러부분을 참조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별도로 기록하거나 플레이를 녹화하지 않는 이상 이야기를 복기하는 것이 상당히 귀찮다.

연출

사용되는 시각적 기법이라고는 암전과 흑백 뿐이며 이벤트 씬조차 특수효과는 일절 없고 화면을 흔드는 수준에 그친다. 3인 이상이 모이는 CG는 존재하지 않으며 2인 씬조차 주인공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주의: 스포일러


하단의 항목에는 『종이 위의 마법사』의 핵심 스포일러 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주의 바랍니다.







시나리오 파트 1: 인물별 분석

이거나 책에 의해 복제된 인물인명으로 표기한다.

각 장의 표제가 전부 보석의 이름이며, 그 내용도 보석말을 통해 암시하거나 축약하고 있기에 각 인물들에게 배정된 보석과 보석말도 함께 분석토록 하겠다.

루트가 아닌 캐릭터별로 살펴보는 이유

본작의 시나리오는 하나의 큰 줄기를 따라가는 구성이며, 조그마한 개별엔딩들이 if의 분기 형태로 덤처럼 붙어있는 형태이기에 루트로 나누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여기저기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캐릭터별로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작품의 스타일상 캐릭터를 거시적으로 봐야 이해가 쉽다.

시죠 루리: 주인공

주인공이면서도 주인공 같지않은 인물. 이 기묘한 의문은 작품 전체를 훑고 난 뒤에야 풀리게 된다.
루리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주인공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일단 게임의 플롯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줄거리 요약

01~03장 : 루리키사키 남매의 비극
04~13장 : 요루코의 (유사) 성장기
01~12장 : 카나타의 연애 성취기
본작은 교차 서술이 난무하며 회상씬도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에 게임이 보여주는 대로만 따라가면 자연스레 피로도를 느끼게 된다. 골라보라며 던져주는 듯한 6, 8, 9장의 개별 루트 선택지는 막상 진입하면 죄다 IF의 배드엔딩뿐이며 그나마 해피엔드의 탈을 쓴 하나조차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고약함이 있다.

메인스트림을 쭉 따라가다 보면 12장에서 최후의 선택지를 만나게 되며, 그 선택지르 통해 크리소베릴을 없애느냐 남겨두느냐에 따라 각각 12장의 노말엔딩, 13장의 트루엔딩으로 갈리게 된다. 13장 트루엔딩를 완주하면 특전 패치가 적용되어 있을 경우 스페셜 시나리오가 개방된다.

책으로 복제된 인물을 원본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위 구조로 생기는 의문.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없는 리오나 복제된 자신을 부정하는 키사키가 있음에도 이러한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유는 등장하는 두 명의 루리가 어느정도 이질적으로 묘사되는데도 작중에선 쭉 동일인물, 즉 주인공으로서 연속성을 지닌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끓어오르는 충동을 따라 폭력을 행사한 바 있고, 결국 키사키를 따라 죽어버린 루리와 달리 복제된 『루리』는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는 셋(리오, 키사키, 요루코)의 연정을 정리한 뒤 첫사랑이었던 카나타와의 관계를 수복하고 요루코를 돕는다. 그렇기에 『루리』가 원본의 최후에 대해 나약했다고 평가하는 발언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며, 두 루리의 이질성에 대한 묘사 역시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키사키: "결국 인격만 부정하면, 루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군요."
- 2장, 요루코에게
#카나데: (『루리』를 바라보며) "변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빠져 있다고 말해야 할까?"
- 4장,『루리』에게
이처럼 일부 등장인물들도 두 명의 루리가 동일하지 않음을 직,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이야기는 3장에서 끝나버렸으며, 4장 이후는 사족에 불과하다는 작중의 서술 역시 두 존재가 똑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뱀에 발을 그려넣은 이상, 그것은 원래의 뱀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다르면서도 같다

그럼에도 『루리』를 「원본보다 성숙한 루리」, 일종의 상위호환적 존재로 받아들이기 꺼려지는 이유는 주로 키사키에 대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루리』라고 해서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루리』역시 키사키를 사랑했다.〔그녀를 생각하면 여전히 불길이 타오른다〕는 『루리』의 심리서술만이 근거는 아니다. 키사키의 희망이자 유지였던 「웃음이 넘치는 도서관」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 다름아닌 『루리』라는 사실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다.
#미사키: "신입 군은, 그래도 신입 군인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요. 뭔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바뀌지 않았어. 그런 신입 군의 확고함은 분명한 매력이라고 생각해."
- 10장, 『루리』에게
미사키는 언니 카나데와 달리, 그런 그가 본래의 루리와 근본적으로 같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키사키와 같은 길을 간 원본 루리와,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전력을 다한『루리』가 형태는 달라도 진실된 사랑을 추구한다는 본질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존재론을 떠나서, 적어도 본작에서는 복제본은「원본에 한없이 닮아있는 존재」라고 타협해도 좋을 것이다.

정작『루리』본인은 정체성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리오: 히로인

하늘하늘한 인상과 달리 강하고 곧은 심지를 지닌, 외유내강의 인물. 작중 흐름의 전환점 역할도 부여받았다.
리오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로즈 쿼츠의 영년격절·종말윤회』

로즈 쿼츠(Rose Quartz)는 분홍빛 석영의 통칭으로, 연애운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보석이다. 재미있게도 로즈 쿼츠를 손에 넣으면 연인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으며, 로즈 쿼츠는 강한 빛에 오래 방치해둘 경우 빛깔이 퇴색할 수 있다. 리오 루트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점이다. 로즈 쿼츠의 보석말은「사랑을 전하다」이며, 이 역시 6장의 플롯과 일치한다.
로즈 쿼츠 rose quartz
석영 중에서도 분홍빛을 띠는 종류. 부드럽고 따듯한 빛깔 덕에 사랑의 돌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특히 여성에게 인기가 많다. 장미수정(薔薇水晶)이라고도 한다.
보석말: 사랑, 여성성, 연애운, 모성애, 배려심

「도구」그 자체

리오는 존재 자체가 마법의 책으로, 요루코를 위해 평생을 살도록 만들어졌다. 본인이 직접 말하듯 그녀는 도구 취급을 받으며, 자신도 그렇게 여기고 작중의 비중조차 도구 수준이다. 그녀에게 부여된 모든 속성은 시중을 잘 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작품 외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그녀는 야미코가 주도하던 흐름을 크게 비트는 전환점을 만드는데, 이 외에는 별다른 비중이 없다.

리오는 여기에 꿈도 희망도 없는 플롯까지 주어졌다. 메인스트림에서 그녀는 주인공에 대해 무려 세 번의 실연을 겪었고 그조차도 누구의 도움하나 없이 스스로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어떻게든 맺어지는 형태가 있는 타 히로인들과는 달리 자기 루트에서조차 대접이 박하다. 최초부터 시종으로 만들어진 존재, 사랑할 수 없는 운명, 3회의 실연 거기에 얼마 되지 않는 비중까지 참 눈물나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루트인 6장 개별에서조차 억지력에 의해 강제로 주인공과의 일을 잊게되고, 세계에 저항하지 못하는 비참한 끝을 맞이한다.

리오가 10장에서 최후의 「실연」을 홀로 견디는 장면. 굳이 실연을 세번씩이나 하게 만드는 부분에서 작가의 악의가 한껏 느껴진다.

내면의 강인함에서 비롯된 의외의 복병

#리오: "나의 첫사랑은 종이 위가 아니라, 이 현실 세계에 피어 있음을 믿게 해주세요."
#리오: (다시 태어난다면 보통의 여자아이로 살고 싶어요. 그 정도의 소망은 용서해 주시겠죠?)
- 10장, 독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감은 약하지 않다. 이 캐릭터는 카나타와는 다른 방향성의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몇 번이나 피어오르는 연정을 스스로 정리하고, 6장에서는 도구로 규정된 자신의 존재 의의 자체에 저항한다.

#리오: "주인님의 유지를, 리오는 거부합니다."
- 6장, 야미코가 조작해 둔『루리』의 페이지를 뜯어내며
그녀는 딱 한 번 야미코가 짠 판을 통으로 엎는 중대사를 일으킨다.『루리』가 요루코를 위해 살도록 쓰여진 「설정 페이지」를 찢어버린 것이다. 키사키의 표현대로 온순한 메이드에 불과했던 리오이나, 야미코의 조작행위에 대한 반발심과 자신이 모시던 요루코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한 이 행동은 작품의 전개를 크게 뒤흔들게 된다.

리오는 6장에서 『루리』의 책 중 야미코가 썼던 「요루코에 대해 사랑을 강요하는」부분을 뜯어버린다. 그리고 『루리』에게 행복하란 기원을 남기고 사라진다.


키사키: 히로인

얌전해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미로 위험한 캐릭터. 작중 제일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키사키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오닉스의 부재증명』

오닉스(Onyx)는 마노의 변종 보석이다. 잡념과 유혹을 떨쳐내게 도와주며, 외도를 막아준다는 속설이 있다. 정작 그 이름이 붙은 책『오닉스』는 원하지 않는 상대조차 사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루리에 대한 연정을 간직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키사키의 행적은 오닉스의 상징을 그대로 따른다. 게다가 키사키가 죽으면서 루리 역시 그녀를 따라 죽어버렸기 때문에, 말 그대로「외도」를 「부재증명(죽음)」으로 막아버렸다.
오닉스 onyx
마노 중에서도 줄무늬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검은 빛깔이 대표적이나 적색의 south onyx 외에도 갈색, 청색 등등 다양한 색깔의 오닉스가 있다. 호마노(縞瑪瑙)라고도 한다.
보석말: 보호, 집중, 잠재 발휘

『애퍼타이트의 나태현상』

인회석(Apatite)이라는 명칭의 이 광물은 다양한 색과 조형을 지니고 있어, 타 광물과 착각하기 쉬운 물질이다. 이름도 속임수를 뜻하는 그리스어 απάτη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기장이 마법의 책처럼 위장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애퍼타이트의 상징은 신뢰와 유대이며, 키사키가 『애퍼타이트』에 서술한 내용도「모두가 웃는 미래」이다. 정작 본인은 그 이루어진 미래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
애퍼타이트 apatite
인회석(燐灰石)은 인산염 광물의 일종으로 치아와 뼈를 구성하는 주요성분이다. 보통 녹색이나 푸른 빛을 띤다. 고가로 유명한 포스포필라이트(phosphophyllite) 역시 이쪽 계통이다.
보석말: 신뢰·유대·믿음, 끈

『플로라이트의 시공낙하』

플로라이트는 가열하면 청색광을 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빛이 반딧불과 닮았다 하여 형석(螢石)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보석말은 「덧없는 아름다움」과 「비밀의 연애」이다. 전자는 키사키 그 자체이며, 후자는 키사키와 루리의 관계를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명의 유래가 되는 반딧불 역시 성충이 되고 나면 그 아름다운 빛을 발하면서도 고작 15일밖에 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키사키와 닮아있다.
플로라이트 flourite
플루오린화 칼슘(CaF2)으로 이루어진 할로젠 광물. 순수 형석은 색 없이 투명하고 맑으나, 일반적으로 발견될 때는 다양한 색상을 보인다.
보석말: 덧없는 아름다움, 비밀의 연애, 깊어지는 인연

「에메랄드」색의 눈

그녀의 선연한 녹안은 에메랄드를 연상시킨다. 하이라이트 표현 때문에 페리도트에 가까운 것처럼도 보이지만. 키사키는 오닉스에 대항해 죽음을 택했고 키사키 남매는 에메랄드의 보석말인 「영원한 사랑」에 걸맞는 최후를 맞이한다.
에메랄드 emerald
밝은 녹색의 빛깔을 띤 취옥(翠玉)은 녹주석의 일종으로 4대 보석을 꼽을 때 빠지지 않을 만큼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유명. 내구성이 약한 탓에 손꼽히는 가격을 자랑한다.
보석말: 영원한 사랑, 행운·행복, 선의·성실

불행하라는 말버릇

키사키는 현실론자이며 영리하다. 근친의 끝에는 불행밖에 없다. 그렇기에 둘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지만, 야미코 때문에 강제로 맺어져 버린다. 일전에 조심하던 것의 반동 때문이었을까? 실연을 각오하고 있던 그녀였으나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결국 루리에 대한 애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하지만 키사키와의 사랑을 놓지 않은 채로 주인공이 행복해질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버릇이었던 「불행해지세요」는 일견 저주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루리와의 인연을 이어나가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이었으며, 루리와 함께하는「불행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더 누리려는「발버둥」에 불과했던 것이다.

8장에서 복제된 남매가 불을 지른 뒤 최후를 함께 맞이하는 장면. 행복에 굶주렸던『키사키』는 이조차 「해피엔드」라고 생각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키사키』에 대해

고양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키사키는 「고귀한 자신의 각오를 유린당하는 최악의 형태」, 키사키로 부활한다. 하지만 야미코는 『키사키』의 설정으로 〔루리를 실연시킨 뒤 스스로를 파괴〕라는 잔혹한 내용을 써넣었기에 되살아난 그녀는 루리를 실연시킬 일회성 도구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저들은 8장 이후 『루리』가 "키사키의 죽음은 본인의 책임이다"라고 발언하는 부분이라거나, "키사키는 스스로 길을 정했다"며 평하는 부분에서 저항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키사키도 생전에 「중량감 없이 되살아나는 이야기」에 큰 반감을 보이며 싫어했다.

다만 나는 8장에서 『키사키』가 보인 태도는, 부여된 설정 내에서 가장 합리적인 납득을 하기 위한 그녀 나름의 사고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면, 모든 것을 안 시점인 12장의『라피스라줄리』에서 등장했을 때 『루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미코의 설정에 의해 스스로 소멸하는 장면이, 도리어 『키사키』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듯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키사키의 마무리

#키사키: "나는 루리를 좋아했었습니다. 나는 굳세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루리조차 좋아했어요. 하지만 요루코 씨는 나처럼 할 수 없겠죠. 그러니까 루리는 요루코 씨의 기분과 마주해야만 합니다."
#키사키: "그것은 내게는 할 수 없었던―― 용기를 수반하는 사랑의 피리어드."
- 『루리』에게 요루코를 부탁하며.
피리어드(Period)는 마침표를 의미한다.『루리』와 마찬가지로 『키사키』도 감정을 정리하고 실연을 할 수 있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좋아했다는 사실을「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은 결코 고백할 수 없었음을 실토한다. 그리고 요루코를 신경써달라는 상냥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앞의 대사에선 키사키가 스스로를 강하다 표현하지만, 후의 대사에선 연약함을 내비친다. 특전에서 그녀에 대해 평하는 '그녀는 연약한 보통의 여자아이였다'는 대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죽는 것으로 연정을 간직했지만, 루리를 불행으로 데려가는 고백을 자신이 먼저 시도할 만큼 독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인상적인 최후이지만『키사키』는 한번 더 요루코를 도와준다. 요루코가 분노에 휩싸여 「최악이 될 실수」를 저지르려던 찰나에, 등장하여 독설을 퍼부으면서 요루코를 질책하고 그녀가 나아갈 수 있게 격려해준다.

10장에서 밝혀지는, 3장 시점 키사키의 최후. 보란듯이 트럭에 뛰어들면서 크리소베릴을 향해 "꼴 좋다"는 유언을 남긴다.

마지막까지 못난이로 우물쭈물하는 요루코에게,『키사키』는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등을 떠밀어줄 만큼 친절했다.

키사키의 선택과 그 매력

본작은 키사키에게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리고 키사키는 명백히 유교지 가의 희생양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행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쏠쏠하게 써먹히며 퇴장당하고, 고양이 따위에게나 추억으로 남는 비극의 히로인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드는 의문이 있다. 루리든, 요루코에게든『오닉스』를 열어버렸다고 토로했다면 이후의 결과는 바뀌었을 것이다. 루리는 말할 것도 없고, 요루코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리오를 살리기 위해『로즈 쿼츠』를 찢으려 했던 것처럼『오닉스』 역시 포기했을 것이다.
#키사키: "저것은, 내가 마음대로 바보짓을 했을 뿐입니다. 다른 누구의 책임도 아닌, 츠키야시로 키사키의 실태입니다."
- 8장, 자신이 오닉스를 연 행위에 대한 평가
똑똑한 키사키가, 과연 루리가 자신을 따라 죽어버릴 거란 예상을 못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든, 루리와 함께하기 위한 것이든 어디에 비중을 둔다 해도 제정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키사키는 오싹하면서도 매력이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뭐…… 이 모든 것은 야미코가 「최악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긴 하다. 그러니 굳이 욕을 하고 싶다면 야미코에게나 하자.

키사키는 잿빛 속에서도 빛을 발할 만큼 누구보다 존재감이 강했지만, 정작 끝까지 살아남진 못했다.


카나타: 히로인

밝고 쾌활한 반 친구에서 모범적 히로인으로 거듭나는 캐릭터. 본작의 등장인물답게 이상(理想, 완전에 가까움)적이면서 동시에 이상(異常, 정상과 다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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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배격원리』

비취의 보석말 중 하나는 다름아닌 「인내」다. 해당 장뿐 아니라 작품 내내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한 카나타의 행적이 엿보인다.
비취 jade
짙은 녹색의 빛을 띤 경옥(jadetite), 상대적으로 연한 빛깔의 연옥(nephrite)을 통칭한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 사랑받아 온 보석이다.
보석말: 인내, 조화, 성공, 번영

『사파이어의 존재증명』

사파이어는 진실, 성실, 강한 정신력을 상징한다. 카나타가 착용하고 있는 네클리스의 보석 역시 사파이어로 추측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력, 끝까지 루리의 곁을 지키는 성실함, 가려진 진실의 당사자 등등 사파이어의 의미는 카나타의 속성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파이어 sapphire
푸른 빛을 띠는 강옥의 일종으로 청옥(靑玉)이라고도 한다. 4대 보석 중에서는 막내로 꼽히지만, 사파이어의 선연한 푸른빛은 하늘을 연상시켜 예로부터 왕족과 성직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보석말: 진실, 성실, 자애, 지혜, 신성, 은총

『아메시스트의 괴기전승』

아메시스트에는 정신적 불안을 잠재우고 평온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있다. 4장에서 흥분한 카나타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요소. 보랏빛은「비밀」과「신비」를 상징하는 만큼 괴기전승에 걸맞는 보석이라 할 만하다.
아메시스트 amethyst
보랏빛을 띠는 석영을 자수정(紫水晶)이라고 부른다. 자색은 역사적으로 희귀한 색상이었기에 귀족들에게 사랑받았다. 4대 보석의 바로 뒤를 잇는 입지를 지니고 있어, 5대 보석으로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보석말: 평화, 성실, 평온, 침착

네 번의 시도 끝에 사랑을 성취한 승리자

애초에 모든 히로인 중 선수를 취한 것은 카나타였다. 리오는 스스로 감정을 정리했고, 키사키 역시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루리가 카나타의 고백에 들떠서 그 사실을 흘리는 바람에 요루코가 따라와 『사파이어』를 열어버리고 둘의 기억이 조작되면서 첫 번째 실패를 한다.

1장에서는 귀향한 루리와 친해지려던 카나타의 소망이 『비취』를 열지만 별 소득없이 사건이 끝나며 두 번째 실패를 겪는다. 그럼에도 『사파이어』와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키스의 기억이 어렴풋이는 남아있는 상태였고, 4장에서는 자신을 등한시하는 『루리』에게 실망하여 『아메시스트』를 열어버린다. 그와 쇼크건으로 실랑이를 해봤으나 거절당하면서 세 번째 실패를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관계는 계속해서 쌓여 가면서 결국 10장에 이르러 카나타는 모든 기억을 되찾고 재차 고백하여 성공하게 된다. 노말엔딩도, 트루엔딩도 그 관계가 쭉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결국 최종 승자는 카나타라 할 수 있겠다.

유저 시점에서 루리가 카나타와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 그녀는 이때 보여준 밝음과 명랑함을 끝까지 유지한다.

『루리』와 이어진 최종 승자는 결국 카나타가 되었다. 굴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끝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그녀에게 주어진 결실.

작중 제일의 인성과 능력

카나타는 위화감 느껴질 수도 있을 만큼 완벽한 품성의 소유자이다. 『에미시스트』에 영향을 받은 시기만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듯하다.

그녀는 루리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최후를 준비하는『키사키』에게 남도록 설득하기도 한다. 요루코가 자신에게 한 짓을 알았을 때도 잠깐 놀랄 뿐, 곧바로 그녀를 변호해준다. 최종 고백 전에 다른 히로인들에게 그 예정을 고지까지 하는 과한 공정함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카나타는 작중의 모든 인물을 통틀어 가장 출중한 용기와 행동력을 지녔다.
#카나타: "어라? 힘이 조금 약해졌어요? 손도 살짝 떨리고 있어요? 어떻게 된 겁니까? 나, 아직 덜 맞았는데요."
- 12장, 자신을 공격하는『루리』를 상대로 얼마든지 해 보라며 나온 발언
그녀는 7장에서 눈 앞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루리』를 보호하며, 12장에선 크리소베릴의 수작으로 인해 자신에게 적개심을 지니고 달려드는『루리』에게는 "이 정도로 되겠어요? 죽어도 좋을 만큼 루리 씨를 사랑합니다"는 광기의 발언까지 던져가며 그를 맨정신으로 돌려놓는다. 「우리 중 제일 미친 것은 카나타가 아닌가」라는 『루리』의 독백이 나올 만큼 정말이지 독한 정신력을 보여준다.

작중 행적을 살펴보면 진정한 인외의 존재는 카나타가 아닌가 싶을만큼, 인간을 초월한 의지력을 보고 있노라면 솔직히 왜 이런 히로인이 『루리』에게 매달리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그야말로 오버스펙의 히로인.

7장에서 칼을 쥐고 『루리』에게 덤벼드는 도플갱어 나기사를, 카나타는 즉시 맨몸으로 막아서면서 "메인 히로인은 죽지 않아요"라는 메타발언을 선보인다.

12장에서 자신을 때리는『루리』에게 얼마든지 해보라는 장면. 이쯤되면 기가 막히면서 오싹하다.


요루코: 히로인

일단은 히로인에 속하긴 하지만 사실상 루리와 함께 2인 체제를 이루는, 또 하나의 주인공 캐릭터. 작품의 모든 연결고리는 요루코를 통해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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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을 관철하는 작품 전체의 진짜 주인공

#요루코: "끝까지, 이기적으로."
- 12장, 선택지 직전의 독백
요루코는 자신의 발언대로 게임 내내 철저히 이기적인 인물이다. 엔딩 직전까지는 그녀의 이타적 행동조차 선의가 아닌 죄책감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녀가 정상적 사고방식으로 교류를 나누는 장면은, 노말 엔딩과 특전 시나리오에서나 볼 수 있다.
#요루코: "(나는) 매우 더러운 인간이야. 피해자의 얼굴을 하면서, 사실은 빌어먹을 흑막. 인축무해하게 구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현상의 근원이 되었어. 나는, 내가, 제일 싫어."
- 12장, 『루리』에게
자신을 직시하는 대사. 그녀가 이것을 10장 전까지 인정하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작중의 난리가 났다.
#요루코: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너를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했어. 다른 누군가를 저주할 만큼 좋아했어. 너를 아주 좋아해서 어쩔 수 없었어. 쭉,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카나타도, 키사키도, 리오도 아닌, 나를 봤으면 좋겠어. 책으로 도망쳐서, 책에 의지해서… 정말 미안해요."
- 12장,『루리』에게 고백하면서
요루코의 인상적인 고백장면. 여기까지 오기 위해 희생된 것들, 즉 카나타와 리오의 연정, 루리와 키사키의 희생 등을 생각해보면 아름답다기보단 처연하다.
#미사키: "그래, 신입 군은 주인공보다는 좀 더 다른 역할이 어울릴 것 같지. 주인공이란, 유교지 요루코 씨를 말하지 않을까."
#루리: "히로인이 아니고?"
- 3장, 미사키와 루리의 대화 중
미사키의 메타발언 장면. 실제로 본작의 모든 여정은 요루코의 실연과 그것을 뛰어넘는 성장을 위해 짜여있다. 이 게임은「요루코 게임」이라고 불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구조적으로 철저하게 그녀에게 종속되어 있다. 1~3장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루리 남매조차, 게임 전체로 보면 그저 요루코를 위한 미래를 강요당하다 죽은 것에 불과하다.

작중의 모든 인물들이 요루코에게는 호의적일 뿐 아니라, 당연한 듯이 그녀를 돕기 위해 아우성을 치는 광경은 집단 광기처럼 느껴진다. 카나타를 제외하면 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하나, 이쯤 오면 작가가 독자를 기만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만큼 요루코는 「불행의 핵」이면서도 「일방통행의 애정」을 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요루코는 8장까지 혐성지수가 너무 높은데다, 엔딩 직전까지도 그 수치를 꽤 높게 유지한다. 그야말로 싫어하라고 만들어 놓은 인물 같다.

아이러니의 화신

작가는 집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요루코의 이기심을 일관적으로, 철저히 묘사한다.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10장 전까지 그녀의 발언 대부분에는 아이러니 가 내재되어 있다.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현실에서 도망쳐 온 요루코가, 각자 나름대로 애쓰는 다른 인물들― 특『루리』를 질책하고 비난하는 이 모순은 이야기를 되새길수록 돋보인다.
#요루코: "불행을 원하고 불행을 무기삼아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아이. 모순된 사고방식이란, 너무나 사랑스러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 1장, 루리에게
요루코는 어떤 식으로든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아니냐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나, 루리는 그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일축한다. 차후 저 발언 자체가 자신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되기에, 종막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요루코: "만약 엄마가 뭔가를 숨기고 있어도, 나라든가 키사키에게 전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해도, 그건 우리를 위한 말이야. 그러니까 문제없어."
- 2장, 독백
야미코는 키사키의 연정을 망치려는 목적으로, 요루코는 책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키사키를 구할 최후의 수단을 은폐한다. 모녀답다고 해야 할까? 물론 요루코는 열린 책이 오닉스인 것은 몰랐고, 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인식하지 못했기에 고의성은 없었지만 명색이 후계자임에도 아는게 뭔가 싶을 만큼 한심해 보이는 부분.
#요루코: "어쨌든, 제대로 끝내. 히로인에게서 도망치는 주인공은 보기 흉할 뿐이야."
- 4장, 『루리』에게
이 대사를 하는 시점에서, 이미 원본의 루리는 도망은 커녕 키사키의 뒤를 따라갔다. 오히려 요루코가 현실과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요루코: "스스로를 죽여서 현실로부터 도망간 넌, 두 번 다시 행복하게 될 수 없어. 네 행복은 절대 실현되지 않아. 루리는 널 사랑하지 않고, 행복하게 될 수도 없어."
- 4장, 유령『카나타』에게
말을 건네는 대상은 카나타이나, 대사 자체는 키사키의 죽음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문제는 요루코 역시 키사키의 죽음에 책임이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발언은 요루코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요루코: "널 실연시키는 것이, 이 이야기를 끝낼 방법이라 생각하니까."
- 4장, 유령『카나타』에게
웃기게도 이야기 전체가 향하는 종착점은 요루코의 「실연」이다. 주변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끔찍한 연쇄는, 요루코 자신이 실연해야만 끝이 나는 것이 아이러니.
#요루코: "네가 붙어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 6장, 리오의 책임을 『루리』에게 떠넘기며
정작 『로즈 쿼츠』가 열린 이유는 요루코의 질투와, 야미코에 의해 금지당한 리오의 소망 때문이었다. 루리에게는 조금의 책임조차 없었던 것.
#요루코: "키사키가 없어진 후, 질질 끌면서 널 머무르게 해줬지만 이젠 잘못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넌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어. 내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야. 지금까지 잘도 체류를 허가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 7장, 『루리』에게 리오의 소멸에 대해 화풀이하며
키사키와 리오가 누구 때문에 그 꼴을 당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묘하다. 이미 루리는 3장에서 죽음으로 대가를 치루었고,『루리』조차 야미코에 의해 억지로 되살아나 요루코 뒷처리를 떠맡은 상태임을 보면 정말 혐성지수가 폭발하는 대사이다.
#카나타: "그럼 루리 씨를 만나러 갈까요. 지금쯤이면 딱딱한 교회 바닥에서 주무실 테니까요."
#요루코: "그건 싫어. 저쪽에서 돌아올 때까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거야. 어쩐지, 졌다는 생각이 드니까."
- 7장, 내쫒긴 『루리』를 맞이하러 가자는 카나타에게
요루코는 자신이 일방적으로『루리』를 내쫒았고, 그 결정이 불합리하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행동하면 지는 것 같으니 방관하겠다고 한다.
#요루코: "어째서 먼저 죽은 거야! 바보! 나를 혼자 두고!"
- 8장, 되살아난 『키사키』에게 매달리며
키사키의 죽음에 누구의 책임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씁쓸한 장면.

「전부 루리가 나빠요」
요루코는 아무 대사나 적당하게 집어도 정도의 차이일 뿐, 저런 것들 뿐이다.

불행의 핵이자 책임자

요루코는 무능한 일반인이 아니라 유교지 가의 혈통을 이어받는 진짜 마법사다. 그녀가 마냥 피해자는 아니라는 점이 계속 작중에서 강조된다.
#『루리』: (결코 마법의 책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열고 있는 것은 아니다)
- 5장, 독백
『루리』를 통해 책이 마음대로 이야기를 여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크리소베릴: "오해해서는 안 돼. 요루코는 언제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으니까."
#크리소베릴: "알았어요. 그렇다면 그 눈으로 현실을 읽으세요. 아픔을 알고, 가해자라는 것을 알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 돼요."
#요루코: '미안해요. 나는 매우 나쁜 아이입니다. 피해자인 척을 한, 가해자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적시의 무언가를 바라면서 살아왔어. 그럴 때마다 다른 누군가에게, 다른 무언가에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은 모른 척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취약한 나는 살아갈 수 없어서.'
#요루코: "야마 이런 나를, 독자는 경멸하겠지요."
- 10장
크리소베릴과 요루코 양 측의 대사를 빌어 가해자임을 강조한데다 독자, 즉 유저가 경멸하리라는 예측까지 집어넣었다.
#요루코: '방해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것은, 반드시 분명한 나의 의사. 종이 위의 마법사는 그것에 응해 주었을 뿐. 나와 닮은 그녀는, 나 자신의 어둠일 것이다. 편해지려고, 행복하려고 피해자의 가면을 쓰면서 비극에 한탄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
#크리소베릴: '유교지 요루코는 가해자니까―― 이젠 정색해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덧칠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 12장
요루코의 입을 빌어 더욱 직접적으로 누구의 의지를 따랐는지 제시하고 있다.
#크리소베릴: "첩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요루코가 굳이 바라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은 없었어. 그 원인 둘 다가 있는데, 마음이 편치 않지요?
- 13장
크리소베릴이 마지막으로 「원인」이라고 확인사살해주는 모습.

이 텍스트들은 일부에 불과하며, 작중에서는 무수하게 「요루코는 가해자(加害者)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크리소베릴은 요루코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이 텍스트들의 진실성이 두드러진다.

야미코는 잊혀질 만 하면 등장해서 묵묵히 악행을 저지르고, 크리소베릴은 대놓고 악역 행세다. 그러나 요루코는 1~8장 내내 피해자 행세만 하다가 10장부터는 서술로 계속 범인이라고 지목당하기에 그 신세가 처량하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요루코에게 책임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책임지분을 따지자면 크리소베릴을 팔아먹은 부모와 그녀를 태워죽인 민중들, 악행의 중심지 유교지 가문이 각자 한몫씩 차지하고 있다. 특히 맹목적인 자식사랑으로 눈을 멀게 하고 타인의 인생마저 훼방을 놓은 야미코의 지분이 가장 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의「사실은 다 피해자였다」라는 전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저 욕만 먹기에는 그녀로서는 억울한 것도 사실이다.
#요루코: "깨달아야 하는 것을 계속 간과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 일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죠."
#호타루: "당연하다냥. 당주에게는 그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냥. 누구보다도 먼저 사랑에 져서 죽은 주인은, 살아서 헤매는 당주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다냥."
- 특전 영상에서

위에서 당주는 요루코, 주인은 키사키를 의미한다. 호타루는 특전 영상에서 등장하는, 키사키가 돌봐줬던 고양이.
특전에서 딱 한번 언급되지만, 요루코 역시 자신이 평생 짊어져야 할 책임인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 장면을 봐도, 딱히 안타깝다거나 슬프진 않았다. 꿋꿋하게 살아온 다른 애들과의 대비가 너무 심했다.

성장의 아쉬움

요루코가 성장과 비슷한 무언가를 보여준 것은 맞다. 그러나 스스로 해낸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녀는 최종장 직전인 12장에서조차『라피스라줄리』가 파괴되자, 분노에 의식을 싣고 루리의 행복을 통째로 부숴버릴 생각을 했다. 직전까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없는 세계를 그려놓고도 잘못을 그대로 반복하려 한 것이다.

그런 요루코를 말려준 것은, 다름아닌 『키사키』의 잔재. 유교지 家에 의한 제일의 피해자임에도, 키사키는 그녀를 질책하고 나아가라며 격려해준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조차 요루코는 싫다는 변명 일관도다. 이쯤되면 왜 이렇게 수동적이고 모자란 인물로 만들었는지 의심을 할 정도이다.

거기에 또 아쉬운 점은, 그녀가 끝내 루리의 죽음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루코가 사과를 했어야 할 대상은 누구보다도 최초의 루리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키사키와 루리의 무덤을 만들어주는 장면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본다.

내게 가장 괜찮았던 요루코는 12장 노말엔딩의 요루코다. 굳이 왜 그것을 노말엔딩에 넣었을지, 크리소베릴이 주목받는 13장 트루엔딩에는 왜 반영하지 않았는지는 약간의 생각이 있는데 뒷부분의 시나리오 파트 2에서 기술하도록 하겠다.

히로인 최약체 요루코와 그 존재 의의

트루엔드는 보통 작가가 제시하는 일종의 「모범답안」이다. 작가는 13장을 제시하며 요루코와 크리소베릴을 밀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키사키와 카나타만 더 돋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결연한 키사키와 강인한 카나타는 각각 루리와『루리』를 얻는데 성공한다. 리오는 태생부터 경쟁이 허용되지 않았으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반면 요루코는?
#요루코: "그런 날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오늘 실연했어요."
#요루코: '두 번 다시, 루리는 내게 마음을 써주지 않을 것이다.'
- 12장
그 장대한 모든 밀어주기에도 불구하고, 요루코는 저버렸다. 요루코 게임이면서 그녀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물론 여기까지 와서 요루코가 승리하는 결말은 작품을 송두리째 시궁창에 박는 행위이니만큼 당연히 불가능하다. 작가 역시 9장의 요루코 개별 엔드가 공상이란 점을 유독 강조한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다. 요루코라는 캐릭터는 매력도 약하다. 8장까진 독설만 퍼붓고, 9장에서의 모습은 거짓이다. 10장에서는 진실을 다 알기도 전에 정신부터 나가있다. 12장에서는 틀어박혀서 망상만 하다가 오빠에게 끌려나오고, 폭주하려다『키사키』에게 고백이나 하러가란 잔소리를 듣는다. 그리고는 바로 차인다. 13장에서는 크리소베릴에게도 히로인으로서 밀린다.

심지어 요루코는 도구 취급이나 당하던 리오와 비교해도 격이 떨어진다. 리오는 1장 이전의 과거부터 마음을 정리했을 뿐 아니라, 총 3회 당하는 실연을 다 스스로 수습해낸다. 요루코가 장장 12장에 걸쳐서 반칙을 저지르고 도움도 받아간 끝에 겨우 한번 시도한 것을 리오는 프롤로그 전부터 자력으로 끝내버린 것이다.

트루엔드 기준으로 작중 인물들의 연애사를 정리해보면 요루코는 더욱 안쓰럽다.
연애사 요약

루리키사키: 서로를 위해 죽으면서 영원히 맺어지는 데 성공
복제된『루리』: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뒤 카나타와 맺어짐
복제된『키사키』: 나기사의 연정을 정리해주고,『루리』를 실연시켜 줌

리오: 세 차례나 실연했으나 스스로 극복
카나타: 1~12장에 걸친 불굴의 구애 끝에 야미코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루리』와 연결
나기사: 키사키에 대한 사랑을 정리함
크리소베릴: 12장까지 악행만 하다가 13장에서 용서도 받고 『루리』와 정도 나눔

요루코: 8장까지 민폐만 끼치다가 9, 10장에선 정신붕괴, 12장에서『루리』에게 차이고 13장에선 조상에게도 패배

요루코는 피해자 이상으로 가해자였던 인물이고, 밀어주기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실패한 시덥잖은 주인공이었다. 작중에서 가장 열심히 밀어줬음에도 가장 원하던 루리,『루리』 어느 쪽도 얻지 못했단 사실은, 그녀를 더욱 구질구질하게 만든다. 12장의 노말 엔드에서는 잠시 찬란한 모습을 보여주는가 했더니 13장의 트루 엔드에선 그 빛남은 온데간데 없고, 특전에서는 영원히 후회하고 살아갈 거라는 후기마저 달려있다.

플레이 동안에는 요루코라는 캐릭터에게 짜증만 났지만, 클리어를 하고 난 뒤 여러가지 생각을 안은 이후는 거기까지 나쁜 감정은 들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철저히 「패배자」로 만들어진 조형에 대한 동정도 있겠으나, 다양한 해석을 곁들이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이유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 몹쓸 인물로 만들어놓은 이유는 시나리오 파트 2에서 추정해보겠다.

요루코를 보면 볼수록 왜 여기까지 답이 없는 캐릭터로 만들어 놓았을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크리소베릴

게임 내내 깐족거리며 밉상인 모습만 줄창 보여주다가 최후의 세탁에 성공하고야 마는 캐릭터. 누군가와 닮았다는 점에 전개를 어느정도 짐작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소베릴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반짝임의 알렉산드라이트』

크리소베릴(Chrysoberyl, 금록석)은 역사가 긴 보석이며 보석말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조용히 지켜보다」, 둘째는「로맨틱한 신호」다. 그리고 크리소베릴은 두 가지 유명한 변종이 있는데 알렉산드라이트와 캣츠아이(묘안석)다.

알렉산드라이트가 특별한 이유는 색의 변천에 있다. 이 보석은 일광이나 형광 아래에서는 녹색 또는 청색을 띠며, 백열광 아래에서는 적자색을 띤다. 가장 값어치가 높게 매겨지는 색상 타입은 녹색-적색 계열로 「낮에는 에메랄드, 밤에는 루비」라는 찬사를 듣는다. 보석말은 「은밀한 마음」이며, 그 의미는 「양면성과 재능의 개화」다.
알렉산드라이트 alexandrite
크리소베릴의 변종 중 하나로, 녹색과 적자색을 오가는 색의 변천이 이 보석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보다도 고가의 가격을 자랑하는 희귀종에 속한다. 특히 캣츠아이의 특성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알렉산드라이트 캐츠아이라는 명칭이 붙으며 부르는 게 값이 된다.
보석말: 은밀, 양면성, 번영, 쟁취, 승리

크리소베릴의 정체

앞서 말한대로 크리소베릴의 보석말은 두 가지가 있다. 「조용히 지켜보다」는 요루코에 대응할 수 있겠는데, 후자는 과연 어떨까? 작중의 제목 중 비슷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블랙펄의 구애신호'. 로맨틱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로맨틱한 신호」를 「연애신호」로 치환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요루코의 눈은 적자색이며, 키사키의 눈은 녹색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알렉산드라이트는 녹색과 적자석을 오가는 보석이다. 작중 등장하는 보석들의 이름을 그냥 붙여준 게 아님을 알고 나면, 이 역시 의미를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요루코의 눈은 적자색이며 키사키의 눈은 녹색이다.

알렉산드라이트의 일반적인 형태 역시 적자색과 녹색이다.

#크리소베릴: "첩의 이름은, 츠키야시로 키사키야.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사이지?"
- 3장에서, 루리에게
#크리소베릴: "처음 뵙겠습니다, 루리 오빠. 나, 츠키야시로 키사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 4장에서,『루리』에게
크리소베릴은 요루코를 제외한 타인에게는 거짓말을 쉽게 한다. 그래서 그녀의 이 대사들은 농담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렇지만 그녀는 원본 루리, 복제된『루리』와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키사키라고 각각 소개한다.
#크리소베릴: "재미없어. 어쩐지 애매한 전개네요. 이대로면 독자가 지루할거에요? 그런 건 비취 때 끝나지 않았어? 귀찮으니까, 빨리 끝냅시다."
#크리소베릴: "아, 그렇지만. 지금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유령 소녀지만?"
- 4장에서,『루리』에게
크리소베릴은 지루하니까 『에미시스트』 사태를 빨리 끝내자고 하며, 한편으로 피아노를 언급한다. 키사키는 1장부터 「관객석에서 마지막을 기다리는 건 싫다」고 했으며, 『비취』가 열리자 직접 개입하여 사건의 종결을 앞당겼다. 그리고 본작에서 피아노에 관련된 인물은, 오직 키사키 뿐이다. 그렇기에 크리소베릴의 저 발언들은 의미심장하다. 마치 키사키가 1장의 『비취』에서 카나타의 자작극을 밝히듯이, 크리소베릴은 4장의 『에미시스트』 에서 카나타의 자작극을 까발린다.
#크리소베릴: "이야기는, 당신 손으로 만드는 거야. 백지의 미래를 그리는 것은 마법의 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니까"
- 3장에서
#크리소베릴: "마법의 책이 열려있는 이상, 사실도 소설도 존재하는 거야. 그 경계선은 한없이 일그러져 있어.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국 대본을 흉내냈을 뿐인 모조품이야. 사실은 인공적인 것이니까."
- 9장, 요루코 루트에서
#키사키: "가짜의 관계, 모조의 관계, 거기서 태어나는 것은, 커튼 콜이 끝나면 없어져 버립니다."
- 1장
#키사키: '대본 위의 행복으로부터, 제발 깨어나지 않기를,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언제까지나 사랑하도록.'
- 9장, 요루코 루트에서
이런 유사한 뉘앙스의 대사들을 보면, 키사키의 일부가 크리소베릴에게도 어느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요루코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대전제에 충실하기 위해서만 책을 사용할 뿐이며, 자신의 눈으로는 공상의 세계를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는 크리소베릴의 사고관 역시 키사키와 닮은 면이 있다.

그렇기에 「로맨틱한 신호」는 키사키를 반영하는 것으로 설정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렇게 해석하면 뜬금없이 13장에서 크리소베릴이『루리』에게 욕망으로 굶주려 덤벼드는 것도 나름대로의 변명은 될 것이다.

물론 키사키가 반영되었다 한들 크리소베릴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이 생길 수 없다.

크리소베릴에 대한 감상

박해받은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저지른 악행은 너무나 뚜렷하게 그 궤적이 남아있다. 크리소베릴은 13장에서 악심을 버린 후에도 본인이 저지른 짓을 아주 잘 알고있고, 앞으로도 참회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기는 한다.

그런데도 쉽게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요루코의 고백 직전까지 루리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약을 올리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타면서 타인을 기만하려는 불쾌한 태도를 쭉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마법의 책을 펴는데 일조하고 하나같이 불행한 결과만을 탄생시켰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크리소베릴: "루리 오빠는, 첩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키사키가 죽는 원인을 제공한 건 첩이라고?"
#크리소베릴: "첩이 루리 오빠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특히 키사키에는 원망받아도 아무 말도 말할 수 없어요. 능숙하게, 원만하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잊어선 안 돼요."
- 13장
본인조차 루리의 결정에 반신반의할 만큼, 저지른 짓이 가관이다. 게다가 성우의 연기 덕분에 등장할 때마다 깐죽거리는 느낌이 유독 강하다. 무엇보다도 짜증나는 점은, 야미코와 달리 그 악행에도 불구하고 죗값 따윈 전혀 치루지 않은 채 구원만 받았다는 점이다. 그런 행복한 결말을 준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의문들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 파트 2에서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크리소베릴은 최초의 대면부터 호감가지 않는데, 가면 갈수록 얼굴만 봐도 짜증나게 된다.

머리가 영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12장까지의 그 기나긴 행패를 보았는데도 이런 장면으로 감동할 리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중 최악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나기사

진행의 연결점을 만들어주는 조연이면서, 때로는 유저의 감상을 대신해주는 관찰자이다.
나기사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키사키를 연모한 순정남. 서자 포지션으로 요루코에게 연민을 느끼며 가족으로서 사랑해주었다. 시스콘은 졸업하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는 나름의 명대사도 남겼다.작중에서는 유저의 감정을 대신하여 토로·표출하는 역도 맡고 있다.

5장에서는 문답무용으로 검은 책 『메라나이트』를 박살내고, 7장에선 키사키의 죽음이 불합리하다며 울분을 내뱉는다. 12장에서는 요루코에게「망상극 때려치고 똑바로 대화해라」며 잔소리를 퍼붓고, 13장에서는『루리』에게 너무 무르다고 투덜거리며 트루엔딩의 결말에 불만을 표출한다.

나기사는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인상의 캐릭터다.


야미코

최초의 옅은 인상은 점점 사라져가고, 그 행적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점입가경의 인물.
야미코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처음에는 그저 피해자였으나 정신적 문제가 심각하여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간, 작중 제일의 가해자이자 원흉. 본인 역시 세계제일의 악당으로 죽는다고 유언 비슷한 것을 남겼다. 요루코가 성장할 기회를 직접 뺏어간데다 히키코모리로 안주하는 환경을 꾸며주고, 교육도 대충 하고 방치하는 등 모친으로서도 글러먹은 유형.

작중의 굵직한 악행은 다 맡았다. 카나타가 루리에게 한 첫 고백을 적당히 지우는 바람에 서로 조심하고 있던 루리 남매가 엮이게 되는 재앙을 초래했으며, 키사키가 오닉스를 편 것을 알았지만 '루리와 헤어지면 좋지'라고 생각하며 방치했다. 야미코는 키사키가 죽은 뒤에도 변명만 주절거렸으며 루리가 그녀를 따라 죽은 뒤에도 정신을 못 차린다.

요루코의 시종으로 리오를 만든 것도 야미코다. 그런데 고백할 마음도 없던 리오에게 사랑을 금지하는 설정을 써넣어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자신의 계획을 망하게 만드는 실수를 했다.『루리』에게는 요루코를 강제로 사랑하도록 설정을 써넣었고,『키사키』에게는 루리를 실연시킨 뒤 스스로를 없애란 설정을 써넣는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악마들도 혀를 내두를 위인이 아닐까?

미안하다면서 다음에 하는 행동은 또 악행이니 여러모로 대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카나데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는 드라이한 인물로 첫 인상을 남기지만, 실제로는 인간미가 엿보이는 조연.
카나데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동생인 미사키를 아끼는 탐정 언니로 일단은 차분하고 냉정한 어른 조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열 받으면 아이같이 굴기에 그다지 역할이 와닿지 않는다. 그녀는 작중에서 딱 한 번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게 하필이면 키사키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책이 뭐냐고 묻던 키사키에게 그녀는 사파이어라는「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카나데는 스릴을 즐긴다는 키사키의 발언 때문에,『오닉스』가 검은 책이란 사실을숨겨서 흥미를 잃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키사키는 검은 책이라는 걸 알았으면 손대지 않았을 거라며 독백한다.

카나데는 위치에 걸맞지 않게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다.


미사키

메타발언을 일삼으며 상황에 대한 평가를 하고, 관찰자를 자칭하는 특이한 캐릭터.
미사키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미사키는 자신을 관찰자라고 어필하는 메타 캐릭터다. 적당히 대화할 때는 루리를 '신입 군' 이라고 부르며, 진심의 이야기를 건넬 때는 '시죠 군'이라고 부르는 「구별」을 한다. 10장에서 『루리』가 추억의 대상을 미사키로 착각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그녀가 싫지는 않았던 듯.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성격임에도 특전을 보면 요루코와 친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어른의 이유로 부조리를 옹호하는 카나데를 지적하는 미사키. 꽤 괜찮은 캐릭터임에도 이런 게임을 만나서 한 자리도 얻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런 낚시를 넣어놔서 더욱 제작사가 괘씸하다. 관찰자 포지션을 버리는 미니 시나리오도 좋았을 텐데.


시나리오 파트 2: 게임의 해석

남은 챕터 제목의 의미들

카나타, 키사키, 리오에 관련된 표제는 앞에서 히로인을 다루면서 다 설명하였고 남은 항목만 아래에 기술한다.
챕터 표제에 대한 분석 보기/접기

『루비의 합연기연』- 요루코

잘 알려진 상징은 용기. 그리고 요루코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용기였다. 한편으로 승리 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연애에선 패한 요루코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그녀답게 아이러니하다.
루비 ruby
붉은 빛을 띠는 강옥의 일종으로 홍옥(紅玉)이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꽤 오랜 기간을 보석의 왕으로 군림했고, 지금도 여타 보석에 밀리지 않는 위상을 자랑한다.
보석말: 용기, 사랑, 극복, 축복, 생명

『블랙펄의 구애신호』- 나기사

진주는 기본적으로 순결, 슬픔, 고통 등을 뜻한다. 그리고 흑진주는 힘과 비밀의 상징을 띤다. 키사키를 사랑한 나기사의 연정과 그의 행적을 연상시킨다.
흑진주 black pearl
「흑나비조개」라는 검은 외투막의 조개가 만들어내는 진주. 이름은 흑진주이나 실제로는 무지개의 찬란한 빛깔을 함께 내며 모든 진주 중에서도 가장 귀하기에 왕비들이 선호하곤 하였다.
보석말: 힘, 비밀, 권위

『화이트펄의 포말연모』- 요루코

나기사의 사랑이 블랙펄로 비유되었던 것처럼, 요루코의 사랑은 화이트펄로 비유되었다. 흰 진주는 순수함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기에 신부가 차는 고전적인 보석이다. 등장인물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박살낸 야미코는 어디까지나 악당이었지만 딸인 요루코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보이는 듯하다.

한편 포말연모에서 포말(泡沫)은 물거품을 뜻한다.책『화이트펄』이 야미코에 의해 조작된 내용임을 생각해보면 이 역시 적절한 제목.
진주 pearl
진주조개나 대합, 전복 등이 만들어내는 탄산칼슘 덩어리로 보석으로 취급된다. 생성 과정에서 순결, 고통 등의 의미가 붙게 되었다. 흰색, 크림색, 핑크색 등등 다양한 빛깔을 띤다.
보석말: 순결, 슬픔, 고통, 장수, 건강

『팬텀 크리스탈의 운명연쇄』- 요루코

유령수정(Phantom Quartz)으로도 불린다. 이 보석의 특징은, 성장이 한번 멈춘 수정 결정 내에 이물질이 들어가고 그 상태로 다시 성장하며 완성된다는 점이다. 덕분에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작명의 의미는 유교지 모녀의 행적의 은유일 것이다. 야미코는「조작한 과거」를, 요루코는「책을 통한 테스트」를 이물질로 심었다.
팬텀 쿼츠 phantom quartz
기존의 결정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rock crystal의 일종. 결정이 형성되며 생성되는 경계는 phantom이라고 호칭되는 수많은 미세 입자들의 작품을 보여주기에 보석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보석말: 성장, 치유, 보호, 개방, 순환

『옵시디언의 인과목록』

흑요석이라고도 한다. 사실 보석보단 무기 재료로 알려져있다. 부합하는 의미는 「진실」이다. 10장에서 진실이 쏟아져 내림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작명.
옵시디언 obsidian
화산에 의해 만들어지는 화산 유리(volcanic glass)의 일종. 이물질이 없이 성장하면 투명한 검은 빛깔을 띤다. 일반적인 보석만큼은 아니지만, 특유의 광택 덕분에 장식에 이용되곤 한다.
보석말: 진실, 인정, 직관력, 결단력

『』제목 없는 11장

11장이 비어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3장에서 제목인『사파이어』와 달리 실제로는 『오닉스』가 열린 것을 반영한 듯하다. 직전에 닫히긴 했지만 이미 한 번 제목으로 쓰인『사파이어』를 다시 쓰기도 그렇고, 3장에서 끝난 『오닉스』를 이제 붙여놓기도 뭐하니 있어보이게 제목을 비운 것으로 추정된다.

『라피스라줄리의 환상도서관』- 루리

「라피스라줄리」는 라틴어로 청색을 의미하는 Lazuli에서 유래한 이름답게, 선연한 푸른빛을 내는 보석이다. 한자로는 瑠璃라고 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인 루리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역사가 길어 온갖 좋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으며 주로 「성공, 번영과 행운」을 뜻한다.

청금석은 지닌 사람에게 시련을 내려주고, 그것을 극복하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기에 그간 얽혀있던 스토리의 실타래가 거진 다 풀리며, 요루코를 포함하여 희망찬 분위기로 끝나는 노멀엔딩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제목을 배정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물론 표제답게 주인공이 가장 돋보이는 파트이기도 하다.
라피스라줄리 lapis lazuli
라주라이트가 다량 함유되어 푸른 빛깔을 내는 광물이자 암석.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파란 염료를 내기 위한 재료로도 많이 쓰였다.
보석말: 힘, 지혜, 사랑, 행운, 통찰


요루코의 의미와 게임의 해석

왜 요루코 같은 못난이 캐릭터를 만들었을까에 대한 의문의 답으로서, 나는 요루코에 메타적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작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망상이자 시비이며 「사도의 추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석 보기/접기

요루코가 갖는 상징적 의미

나의 결론은 요루코는 미연시 유저들, 넓게는 서브컬처 독자들에 대한 「은유」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도입부

요루코는 독백한다. 스스로의 의지로 새장에 머무는 것을 선택한 새는, 헛되이 죽을 때까지 날개를 펼치지 않는다고.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읽는 것이 생애이며, 타인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특이하게 보이는가 안다고 했다.

요루코는 그런 삶을 마음에 들어했다. 활자뿐인 새장의 세계는 밖보다 훨씬 훌륭해 보였다.
그렇다. 미연시는 공상의 산물이지 현실이 아니다. 자신들의 것이 아닌,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작품이 그렇듯 공상의 세계는 현실보다 멋지고 좋아 보인다. 작중의 현실을 거부하고 책의 세계에 빠진 요루코처럼― 유저들 역시 그런 공상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몰두하기 때문에 작품을 읽고 플레이하는 것이다.

이 의도대로 작가처럼 '짓궂게' 게임을 해석하면 요루코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 요루코가 불행의 원인인 이유. 작중의 모든 인물이 요루코를 선선히 돕는 이유가 다 해명된다.
그야, 「요루코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이니까.
유저의 선택에 의해 그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히로인들은, 이기적인 요루코와 유교지 가에 휘둘리는 작중의 인물들과 같다. 하지만 유저(=요루코)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이니까, 모두가 그를 위해 모일 수 밖에 없다. 요루코가 자신은 직시하지 못하면서 타인에게는 거친 독설을 뱉곤 하는 이유도, 히로인을 비롯한 등장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곤 하는 독자의 은유가 아닐까?

요루코가 루리를 거짓 성격으로 시험했음을 밝히는, 혐성 지수가 높은 장면. 이 또한 「히로인 고르기」라는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의미심장하다.

게임을 고르는 이유와 히로인 갈아타기

#카나타: "내가 못생긴 여자아이였다면, 당신은 도와주셨을까요?"
#루리: "누구라도 돕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니까, 상대를 불문하고 손을 뻗치진 않아."
#루리: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속물적이었는지도 모른다)
- 1장
카나타의 저 질문은, 당신은 「외적 요소로 작품을 고르는가?」라는 질문처럼 들린다. 특히 선명하게 언급하는 느낌이 드는 대사라서, 기분이 묘해진다.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여러분은 히로인 얼굴이나 보고 작품 고르는 게 아닌가요?」정도가 될 것이다.
#카나타: "내게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어서, 나보다 멋진 여성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사양말고 버려 주세요. 모두를 이해한 다음, 날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요루코씨를 좋아하게 된다 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분명하게 (그녀와) 마주 봐 주세요."
- 1장
이렇게 뭉클한 대사를, 이런 해석에 쓰는 것은 약간의 저항감이 들지만.「선택당하는 히로인의 처지」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도 해본다.

카나타의 지나치게 완벽한 모습은 이상의 히로인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서브컬쳐적 클리셰에 대한 비판

한편으로 『키사키』가 설교하는 최후의 장면 역시, 여기에 입각해서 보면 방향성이 있다. 사랑이란 본래부터 더럽고 질척한 것으로, 미소녀 게임에서 보여주는 사랑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일 것이다.「당신들이 찾는 멋진 사랑? 그런 건 현실에 없습니다」라고 말이다.

루리 남매가 죽은 뒤 각자가 '꼴 좋다' 는 유언을 남기는 장면은, 약속의 전개― 그러니까 친남매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통렬하게 한 방을 먹이는 그런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중에서는 '조소'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현실을 억지로 바꾸려 든 마법사를 비웃는다. 마치 「친남매의 사랑? 그런 게 어딨냐」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해할 수 없는 13장의 트루엔드도 이 관점에서는 목적성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작품에서 캐릭터를 '세탁'할 목적으로 과거 회상을 쓰고는 한다. 크리소베릴은 철저히 악행만 저질렀으며, 자신을 용서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직접 되묻기까지 한 악당이다.

그런 그녀에게 일부러 불쌍한 과거로 면죄부를 주고, 실 주인공 요루코를 앞지르게 만들면서 작중 제일의 해피엔드를 맞이하게 해주는 대접이란, 그것에 대한 비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설픈 악당 세탁만큼 거슬리는 것도 잘 없다.

현실을 마주하라는 권유

#요루코: "…질문을 바꿀까요. 어째서 너는, 그렇게까지 해서 사회에 녹아드려고 하는 거야?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키사키: "이상한 소리는 그만두세요. 사회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어디서 살려고 합니까."
#요루코: "사회가 싫으면, 이 도서관에서 살면 되잖아."
#키사키: (정론을 내세우는 내게 요루코 씨는 압도적으로 잘못된 길을 제시한다)
- 3장
공상을 꿈꾸는 요루코와, 현실을 보라는 키사키의 반응이 대조적이다.
#키사키: "어째서, 다들 틀어박힐까요. 제복을 입고 등교할 수 있는 날은 지금뿐인데. 이 세계는, 결코 활자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니까요."
- 5장
#크리소베릴: "마법의 책은, 말하지 않아. 현실을 논하는 건 언제나 인간이죠?"
- 6장
#카나데: "…마법의 책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네게는 다른 삶의 방법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 7장,『루리』에게
작중에서는 이런 식으로 현실을 마주하길 권하는 대사들이 종종 보인다. 굳이 메타픽션적 해석이라는 돋보기를 갖다대지 않아도 알 법한 직설적인 권유들도 있다.
#『루리』: (종이 위가 아닌, 현실 위에 그려지는 스토리. 그것이 살아있다는 의미란 걸, 나는 알고 있다)
- 13장
작품 본편의 막을 내리는 최후의 서술이다.

그럼에도 즐거운 것

#카나타: "루리 씨가 나올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루코 씨의 결단을, 지켜보는 것뿐이니까."
#『루리』: "그럴지도. 그 의미대로라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루코 외에 없을 테지. 나는 다만 그것을 지켜보는 이야기꾼 같은 것인가."

#『루리』: (요루코는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면서, 태양의 빛을 쐰다. 그것이, 그 변화가 견딜 수 없이 기쁘다. 누군가로부터 강요받은 것도 아니고, 다만― 자신의 의지로 밖으로 나온 요루코를 바라본다.)

#『루리』: "오늘은 좋은 날씨야."
#요루코: "에에, 그래. 책 읽기 좋은 날씨군요."

#『루리』: (그런데도 나오는 것은 소설의 화제다. 그렇지만, 그것은 변함없이 좋은 부분)

#『루리』: "이런 날은 어떤 소설이 좋을까?"
#요루코: "현실이라고 하는, 당연한 이야기는 어떨까."
#『루리』: "좋은데. 매우,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구나."

#요루코: "이제 더 좋아하는 것이 생기겠지요. 다양한 것을 보고, 알고, 다루고― 좋아하는 것이 늘어가. 앞으로 그것이 기다려져요."
#『루리』: (지금의 요루코는 눈부시고, 훌륭해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 12장 노말엔딩에서 카나타, 『루리』, 요루코의 대화
여기서는 책, 그러니까 공상의 세계 역시 인정은 하고 있다. 물론 마법의 책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책 자체의 즐거움을 부정하진 않는다. 게다가 게임 내에서 가장 찬란한 요루코는, 트루엔딩이 아닌 바로 이 노말엔딩에 있다.

이것 또한 일종의 「역설적 표현」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마음에 든 장면을 끼워맞추는 것일지도 모르나, 작가의 성향을 고려하면 더 의미있는 엔딩을 이런 식으로 아이러니하게 배치하는 걸 의도했다는 생각도 든다.

트루엔딩과 특전 시나리오에서는 속죄나 참회의 형태에 가깝게 행동하는 요루코가, 유일하게 이 노말엔딩에선 "메데타시, 메데타시"라는 희망찬 대사로 마무리를 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게임 전체를 통틀어 빛나는 요루코는 오로지 여기, 노말엔딩에만 있다.


이야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메타픽션

본작의 주요 소재는 마법의 책이고 작중 인물들은 그에 의해 휘둘린다. 그렇기에 책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1장에서 키사키의 입을 빌어 「상질의 플롯에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무의미한 서술이 없다」고 호언장담한다. 글에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도 전한다. 때문에 단순히 처한 상황에 대한 평으로 보기에는 메타픽션적 해석의 유혹이 짙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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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루코: "무언가,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어요."
#키사키: "무슨 말을 합니까. 마법의 책이, 상당히 불합리합니다."
- 1장
키사키는 「마법의 책이 불합리하다」고 토로하는데, 실제로 매 장마다 한 권의 마법책이 열리기에 게임 내내 불합리한 전개로 이어진다.
#카나데: "――마법의 책이야. 이런 것이 존재하고 있다니 세상은 미쳐버렸어.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며 받으려는 너도."
- 3장, 요루코에게
카나데 개인의 감상으로만 여기기엔 유사 서술이 많으며 꾸준하게 나온다.
#루리: (죽음을 가벼운 것으로 취급해 버리면 이야기에 중량감이 없어진다. 의미도, 배경도, 설득력도― 모든 전제가 무너진다. 마법의 책은 현실을 모독하고 제멋대로 떠들어댄다)
- 8장, 독백
주인공이 이야기에서 인물을 되살리는 행위는 중량감을 없앨 뿐 아니라 「모든 전제를 부순다」는 직접적인 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본작에선 키사키와 리오는 물론이고 주요 화자인 루리조차 되살린다.
#키사키: "왜 여러분은, 거기에 이야기성을 요구하는 걸까요? 저는 그저 사고를 당했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데 말이죠. 특별한 사인이라면, 납득할 수 있습니까. 슬슬 현실을 봐 줬으면 하는데요."
#키사키: "나는 적당한 전개가 너무 싫습니다."
- 8장
「왜 이야기성을 요구하냐」고 도리어 되묻는다. 「적당한 전개를 싫어한다」는 말도 덤.
#키사키: "루리는, 자신이 왜 이 장소에 있을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이 장소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에, 필연성을 느낀 적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이의 보이지 않는 손―― 그렇지만 그건, 원문처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운명을 그린 것은 지상의 마법사. 그 운명을 움직이는 것은 마법의 책. 흡사 우리는 「말」과 같은 것이겠지요."
- 8장
노골적으로 필연성을 따지고 있으며 자신들이 체스판의 말과 같다고 발언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자신이 관찰자라는 걸 어필하는 미사키 등 메타발언은 무수하다. 다만 이런 발언들과 변모하는 캐릭터성이 겹쳐서 인물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다.
#카나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조차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세계관이니까, 여러가지로 터놓고 이야기할까요? 본편은 어둑어둑하고 기분 나쁜 스토리니까, 여기서 발산하지 않으면!"
- 스페셜 시나리오
초회 특전 시나리오에서는 이런 추측에 방점을 찍는다. 아예 애매하고, 어둑어둑하고, 기분나쁜 스토리라며 작품 스스로를 깐다. 이런 묘사들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 파트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특전 시나리오에서는 아예 대놓고 뒤풀이를 하고 있다.


불합리한 비꼼의 이야기

내가 여기까지 리뷰를 쓰면서도 이 게임을 좋다고 잘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표현의 형식 때문이다. 한 번 시나리오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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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찬 모순

차별 대우

작 품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직시하던 키사키는 약간의 실수에 너무 큰 대가를 치루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기회마저 받지 못했다.
리오는 키사키와 달리 Take 2라는 기회를 받았고, 거기서는 운명을 받아들여 살아남았다.
반면 실패만 거듭하며 모두에게 불행을 안겼던 요루코는 미래에 접할 수 있었다.
작중에서 필요없다고 결론지은 마법의 책 그 자체인 루리는 끝까지 살아남아 카나타와 이어졌다.
최악의 악역 크리소베릴은 벌을 받기는 커녕 최고의 행복을 받았다.
인물뿐이 아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통상의 작법을 다양하게 무시하면서 독자를 상대로 기만전술을 펼치고 있다.
치트 남발

같은 실수를 두번이나 하는 마법사
닫힌 책은 그 시점에서 끝난다는 전제의 파괴
두 책이 상호 간섭 가능하다는 깜작 설정
적당한 타이밍에 신출귀몰하게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사전 예고가 없는 설정 뒤집기와 거짓말
적당하고 편리한 「되살리기」 플롯
작중에서 볼멘소리가 나올만큼 「원만한」 결말

『종이 위의 마법사』는 그야말로 불합리한 이야기의 집대성이자 결정체이다. 그리고 그런 짓을 바로 앞, 《이야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메타픽션》파트에서 설명한 것처럼 스스로 까고 있다.

의도된 불편함과 그 위험성

이 모든 의도된 불편함들은 「비꼼」(sarcasm)의 형태를 띠고 있다. 풍자의 대가로 유명한 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아래와 같은 명언을 남긴 바 있다.
Oscar Wilde 오스카 와일드
"Sarcasm is the lowest form of wit, but the highsest form of intelligence"
비꼬는 것은 위트로서는 최악이지만, 지성으로선 최고의 양식이다.
그렇기에 비꼬는 것은 어렵다. 비꼼에는 늘 「아이러니」(모순)이 따라다니며, 이 아이러니는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비꼬기는 청취자, 그러니까 독자를 기분 나쁘게 할 뿐 아니라 의도를 전달하는 것도 어렵다. 본작처럼 비틀린 이야기, 설정변경과 메타포로 인한 의도된 불편함까지 가세하면 그 난이도는 더욱 더 올라간다.
#1: "여러분, 현실 생활도 챙깁시다."
#2: "틀어박혀서 쓸데없는 거에나 몰두하는 너네 참 대단해."
두 발언의 호감도 차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본작은 클리셰와 반전을 거듭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그것들을 비꼬고 뒤집고 때로는 부정까지 한 끝에 「답은 현실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글을 씀으로써 상당한 포장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에게는「작가가 꼴값 떠네」라는 말을 들어도 될 만큼 지나치게 뒤튼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렇게 포장해봐야 결국 작가가 헛바람 들어서 이야기의 본질을 망각하고 자기만족의 뒤틀린 시나리오나 써낸 게 아니냐?
그러니 누군가는 저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도 충분한 일리가 있을 만큼, 작품은 과하게 꼬여 있다.

나는 한 리뷰에서, 의도란 것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곡해되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본작도 마찬가지로 「리스크가 큰 방식」을 취한 만큼 이해가 일치하지 않을 때의 불호는 당연히 크고 그 또한 작품을 만든 이들이 감수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씁쓸한 맛의 교훈을 굳이 서브컬처를 통해 얻고 싶어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사족

나 역시 메타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독자로서이다. 그래서 독자 자신마저 스토리에 포함되는 노골적인 메타포 게임을 여기까지 분석하는 데는 나름 저항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해석한 이유는 재미만큼이나 불쾌함이 공존하는 게임이었기에, 어떻게든 정갈하게 전체적인 정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이 작가(루쿠루)의 다른 작품을 해본 바가 없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정답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작품 내에서도 자신의 스타일로 작품을 즐기라는 권유가 나왔듯이, 이런 방향성의 해석을 하는 것도 「작품을 즐기는 한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정성이 뛰어나면서도 플롯을 이렇게 짜는 것을 보면 참 짖궂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종이 위의 마법사』 총평

짓궂은 작가의 교묘한 이야기.

총평 보기/접기 어떤 조형물을 보았을 때 기호와는 별개로 그 복잡함이나 크기만으로도 감탄할 때가 있다. 본작도 그러했다. 어떤 감상을 안든 최소한 평가를 할 만한 「무언가」가 있음에는 틀림없다. 괴멸적인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흥미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거기에 진행 도중 이야기를 끝내버리고, 그 사족을 터무니없이 길게 써버리는 이상함. 불합리한 트루엔딩과 정합성을 띤 개별 배드엔딩들. 그리고 그런 트루엔딩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특전 시나리오를 보고 나면, 딱 잘라 평가하기 망설여진다. 플레이하는 내내, 그리고 완주 후 복기할 때의 감상이 이렇게까지 들쑥날쑥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작가는 작중 불합리하다는 마법의 책처럼 전제를 마구 뒤집고, 설정을 덧붙이고 죽은 인물조차 살린다. 스스로 이야기를 무게감을 낯추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쓴 플롯을 까대는 그 기이한 행적에는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는데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노림수」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판단은, 루리의 말처럼 '자신 나름의 스타일'로 분석하라고 유저에게 던져줘 버리기에 나는 재차 이 작가는「짓궂다」고 평하고 싶다.

그리고, 엔딩 영상은 물론 엔딩곡조차 없는 것은 역시 심했다. 코어 시나리오를 특전으로 취급하는 그 괴팍함도. 그럼에도, 떫은 맛을 좋아하는 유저라면 플레이해보고 「사도의 해석」을 해보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21.12.20 리뉴얼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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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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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나도 좋은글입니다 여유가되신다면 예익의 유스티아의 리뷰도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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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생각할수록 어렵고 실험적인 작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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