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의 개연성과 핍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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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이야기를 논할 때 언급되는 개연성과 핍진성에 대한 간략한 설명글입니다.

개연성과 핍진성


목차

01. 개연성
02. 핍진성
03. 개연성과 현실성
04. 핍진성과 현실성
05. 정리




개연성(蓋然性, Plausibility)

개연성의 정의

논리학에서는 가능성을 의미하지만, 문학에서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단어다. 창작물 속의 개연성을 한 줄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플롯이 얼마나 그럴듯한가?

즉 사건이 갖는 『인과성』에 주목하는 개념이다.

더욱 쉽게 풀어보자면 "앞뒤가 맞는가?" 혹은 "설득력이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의 설득 여부는 작품에 대한 감상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그렇기에 개연성은 평론에서 빠질 수 없는 평가 항목이 되는 것이다.

개연성의 부재

예시 1 용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타지 만화 F가 있다. 30화에 이르기까지 용사는 열심히 마왕군과 싸워왔다. 그런데 31화에서 용사가 난데없이 달아나더니, 작품 최종화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앞의 예시 1을 본 독자들은 개연성이란 단어를 모른다 해도 F의 전개에 위화감을 품을 것이다. 달아난 이유도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끝까지 설명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화 F는 개연성을 상실했고 독자를 납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처럼 개연성의 부재가 두드러지는 것은 등장 인물들의 말과 행동, 감정 표현에서 타당성이 없을 때다. 작가는 주관성을 배제했다고 착각하지만 독자가 보기에는 억지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중요한 핵심 장면에서 개연성이 부실하면, 작품이 매우 재미있거나 고유한 가치가 있지 않는 이상은 좋은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

개연성을 파괴하는 장르

그런데 개연성을 망치는 것으로 탄생한 장르도 있다. 바로 호러코미디다.

호러의 기본 작법은 찜찜한 부분을 남겨두는 것이다. 의도된 불편함은 공포심과 불안감을 조장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개연성은 상실된다. 장르의 핵심인 '미지에 대한 공포'는 개연성이 없는 불합리함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러 장르에 속하거나, 호러적 연출이 핵심인 작품이라면 개연성이란 잣대를 아무 데나 들이대어선 안 된다.

한편 코미디의 핵심은 아이러니(모순)이며,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모순을 만들려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전개가 필수적이다. 호러와 마찬가지로 장르 자체가 개연성을 파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코미디 작품에서 얼토당토 않은 전개가 등장해도, 웃기고 재밌다면 독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과한 개연성의 문제

앞서 개연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개연성을 갖추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점이 생긴다. 현실에서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돌아가지는 않듯이, 이야기 속에서도 모든 사건이 정합성을 갖고 진행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품에서 때때로 개연성을 흩뜨리는 전개가 필요한 이유다. 복선과 이후의 설명을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최종적으로 개연성도 챙기면서 재미도 확보하는 작품이 될 수 있다.

개연성의 중요도

개연성은 호러나 코미디를 제외한 대다수의 장르에서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다. 이야기의 개연성이 적절하게 성립할수록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또한 개연성은 작품의 주제를 증명하는 핵심 속성이기에, 개연성이 엉망이면 작품의 주제는 호소력을 상실한다.



핍진성

핍진성의 정의

프랑스 출신의 구조주의 이론가인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가 만든 이 용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아니나, 여러 곳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다. 핍진성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계가 얼마나 그럴듯한가?

쉽게 말하자면 개연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실물감』혹은 『박진감』이라 할 수 있다. 리얼리티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고는 한다. 핍진성은 개연성 위에서 성립하는 요소이나 모태가 되는 개연성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두 개념을 혼용하기도 하는 이유는, 둘다 「얼마나 그럴듯한지」가 판단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개연성과 핍진성의 차이

개연성과 핍진성은 구분할 수 있는 상이한 존재다. 개연성이 플롯의 인과성에 주목한다면, 핍진성은 서사의 실재감에 주목한다. 허구(fiction)인 이야기는 진짜 같을수록 재미있어진다. 그렇기에 핍진성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재미도 부여하는 요소가 된다.

예시 2 "나는 A가 좋아."
이 대사로 화자가 A를 좋아한다는 개연성을 확보한다고 가정하자. 여기에 핍진성을 더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예시 2.1 "나는 A가 좋아. 중저음의 목소리도 멋진데, 얼굴은 또 왜 그렇게 훤칠하대?"

구체적인 묘사를 덧붙여서 더 실감나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매력 포인트에 대한 언급이 적절하게 늘어날수록 핍진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핍진성을 갖추기

핍진성을 높이는 방법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다. 문학적으로는 「서사적 진실의 구현」이라 하는데, 「작중의 규칙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과거에는 기술적, 사고적 문제로 비현실 소재에서 핍진성을 높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양자 특히 전자의 한계치가 높아지면서 그럴듯한 가상의 세계를 감각적으로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핍진성의 중요도

핍진성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개연성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요소다. 고도의 핍진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에서 실재감을 느낄 수 있으며, 마치 정말로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몰입도와 재미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연성과 현실성

이야기는 사실(nonfiction)과 다른 허구(fiction)의 존재다. 하지만 개연성과 핍진성을 통해 실감나고 와닿는 작품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는 허구인데 왜 개연성, 핍진성을 따져? 현실이 아니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답이다. 개연성은 현실성 혹은 사실성에 근거한 요소가 아니다. 직관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원인이 있고 그에 걸맞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현실을 배경으로 한 개연성

예시 3 A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녀 B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졌다.

이 한 줄의 묘사만으로는 예시 3의 개연성이 턱없이 모자라다. 면식도 없는 이를 구하려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은 매우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설정을 붙여주면 된다.

가령, A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좋은 일이나 하고 죽자」고 마음먹었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또는 A가 B를 보며 어떤 기시감을 느꼈고, 그에 따라 직감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쓸 수도 있다.

비현실을 배경으로 한 개연성

예시 4 용사인 주인공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파티 동료들을 배신하고 마왕의 편에 붙었다.

역시 이 한 줄만으로는 예시 4의 개연성이 현저하게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앞서 현 상황을 암시하는 복선이 등장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이에 대한 묘사가 없다면 개연성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용사는 파티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불만을 갖고 있었다」 또는 「마왕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 주었다」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덧붙이면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연성은 현실적이냐 아니냐와 무관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연성은 배경이 현실이냐 판타지냐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인과 관계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로 결정되는 것이다. 즉 「이야기가 허구(Fiction)니까 개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런 오해가 등장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서는 인과성이 곧 현실성이고, 그런 관점을 그대로 문학 작품에 적용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작품이 비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것을 보고 현실적이지 않다=인과성(개연성)이 없다는 식으로 오류를 만드는 것이다.



핍진성과 현실성

핍진성은 「작품 속 현실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헷갈려할 사람들을 위해 복습 차원에서 재차 정의하자면 핍진성은 '실감'이다. 개연성이 「인과 관계가 그럴싸하냐」를 따졌다면, 핍진성은 「설정과 세계관 따위가 그럴싸하냐」를 따지는 것이다.

현실 배경의 핍진성

가령 현대전을 소재로 다룬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기와 전술, 전략을 표현하는 것이 핍진성을 갖추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혹은 역사물로서 중세 유럽의 정치를 다룬다면 봉건제를 기반으로 하여 귀족과 왕, 그리고 종교인들을 주역으로 한 정치적 암투의 생생한 모습이 핍진성을 높이는 데 필요할 것이다.

고증이 훌륭한 작품의 예시로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있다. 영화의 백미로 꼽히는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묘사가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실제 참전용사들이 영화의 진위성을 높게 평가했고 일부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기도 했다.

훌륭한 핍진성에 힘입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역대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그 이름을 올려 왔으며, 전쟁 영화를 꼽을 때는 꼭 들어가는 걸작이 되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다시 말해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묘사를 얼마나 고증에 가깝게 혹은 현실적으로 하느냐가 핍진성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비현실 배경의 핍진성

판타지라면 어떨까? 당연 판타지는 존재 자체가 허구인 만큼 현실성을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한 '그럴듯함'이 있다면 핍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시로 들만한 작품으로 반지의 제왕이 있다.

언어학자였던 톨킨은 다양한 종족의 언어를 직접 창조하고, 그 시간적 변화까지 구현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등장인물 '배긴스'들의 책을 보고 번역한 것이라는 설정을 덧붙이는 식으로 실감나는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여기에 지리, 국가, 종족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방대한 설정, 그리고 그 위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이어지는 이야기와 연표는 작품에 생동감 즉 핍진성을 한껏 불어넣었다.

판타지의 끝판왕 같은 존재라고 해도 좋은 이 작품은 핍진성이 충실한 모범적 설정을 짜놓아 수많은 후대 작가들이 열심히 참고하고 베끼는 바이블이 되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즉, 비현실적 배경이라고 해서 핍진성을 확보할 수 없는 게 아니다. 얼마나 잘 짜여진 세계관과 설정을 갖추었느냐에 따라서 핍진성이 결정나는 것이다.


정리

개연성과 핍진성

개연성
플롯, 즉 작품의 사건과 인과 관계가 얼마나 그럴싸한가를 의미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어야 한다. 적절한 개연성은 재미 뿐 아니라 작품의 주제도 효과적으로 드러나도록 돕는다.
핍진성
서사, 즉 작중의 설정과 세계관을 포함하는 묘사가 얼마나 그럴싸한가를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듯하고, 귀에 들리는 듯하고, 손에 잡히는 듯할수록 실재하는 세계관처럼 느껴질 것이다.


비현실적 소재가 배경이라면, 개연성과 핍진성을 갖추기 어려울까?

배경과 무관하게 개연성과 핍진성은 필수적이다.
개연성과 핍진성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냐 비현실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그럴듯하냐」이다. 즉 비현실적 소재를 배경으로 삼는다 해도 얼마든지 개연성과 핍진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재미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은 2021.12.08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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